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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밤, 세상을 쓰다

[푸디세이아] 0. 감각 잃은 세계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앞서 한 가지 사소한 고백을 하자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져 가는 듯한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뢰 역시 동일한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한 눈치구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모든 감각이 그대로 살아있지만, 그것이 내 뇌까지 실제로 전달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손가락 끝을 열심히 깨물어보면 분명 아픈 것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기억으로 그 모든 감각들을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현재 내가 느끼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죠. 네, 맞습니다. 어떤 믿음도 없습니다. 내 자신의 감각조차 믿지 못하게 된 순간엔, 믿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9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학곰군.txt] 1.자유주제로 뭔가 길게 쓰고싶어 일단 번호를 붙인다. 2. 아 벌써 2번이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두 번째 차례다. 그래. 포인트는 뭐 한 것도 없는데로 가볼까. 마땅히 할 말도 없었는데 잘 되었다 싶다. 3. 시작은 두산베어스 모자로부터다. 나는 2006년. 에스케이 와이번즈가 파랑에서 빨강으로 색을 바꾼 그 해 문학구장에서 모자를 샀다. 야구장을 처음 간 그 날 그래! 이왕 야구장에 온 것 모자라도 사야겠지 않겠는가 싶어서 원정 구단 간이 매점을 기웃 거렸고 지금도 쓰고 있는 네포스 두산베어스 모자를 6천원 주고 샀다. 모자의 나이도 벌써 10살. 비를 피하지 않는 주인 덕분에 비며 눈이며 미세먼지까지 온전히 들이마시더니 노화가 왔는지 색이 티미해졌다. 그렇지만 군청ㅡ노랑의 앤티크..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8 민감하다 [소르피자.txt] E주임은 점심을 먹은 뒤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졌다. 까끌한 면에 손이 쓸려 생채기가 났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손을 털고 일어났다. 보도블록에 떨어져 있는 벚꽃잎들. 그는 자신이 걸려 넘어진 것이 벚꽃을 보느라 한 눈을 팔아 생긴 일이라 생각해 괜스레 벚꽃나무를 발로 한 번 걷어찼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경기가 좋지 않았다. 사기업에 다니는 자신의 친구들은 작년에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고, 얼마 전 있었던 설날에도 상여금이 작년보다 곱절은 더 줄었다며 그에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E주임은 그런 말을 들어도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자신처럼 나라의 녹봉을 받아먹는 공무원쟁이들은, 늘 일정한 봉급을 받고 하던 일만 하면 됐기에 성과급.. 더보기
[음악의 초상] 0. 하루키에게 감사 인사를 블로거 9입니다.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뜬금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한테 인생을 빚졌으니 감사 인사로 글을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평생 뵙기는 힘들겠지만요. 하지만 덕분에 살았습니다. 안 그랬으면 지금쯤 삶은 완전히 파탄에 이르렀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뭔가 맥락도 없이 뜬금없게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그의 소설이 너무 대중적이라는 생각은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 , ,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뿐이죠. 를 빼면, 처음 들어보신 것들도 많으실 겁니다. (진짜 주관적인 의견 하나를 덧붙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가 훨씬 좋아요.) 무튼! 요점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쓰려고 하는 음악 에세이는, 제가 달아놓은 제목을 보시면 아실 수 있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 더보기
[2016 KBS 드라마스페셜] #1 <빨간 선생님> 금서와 빨갱이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언제 마지막으로 말해봤는가. 혹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가? ‘부모님’만큼 익숙한 단어가 선생님이건만 의외로 우리는 선생님을 잊고 살 때가 참 많다. 교수님, 선배님, 부장님이 더 가까울 때가 많다. 2016년 KBS의 대표 단막극 드라마스페셜의 출발을 이끈 은 선생님과 제자의 이야기다. 마지막에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각인시킬만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드라마다. 하지만 그 관계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1985~87년의 시대상을 중심으로 짧은 글에 모든 걸 담아내기 힘들만큼 알차게 내용이 전개됐다. 우선 위의 노래를 재생시켜보자. Queen(퀸)과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보위가 함께 한 명곡 Under Pressure다. 이 곡은.. 더보기
[바꼈스오피스] 37주차(9/12~9/18) * [바꼈스오피스]는 저희가 새로운 기준을 통해 제시하는 영화 순위입니다. 현행 박스오피스는 오로지 영화가 벌어들인 수익, 관객수 등 절대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하여 순위를 매기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바꼈스오피스]는 일종의 ‘대안적 박스오피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새로운 기준에 맞춰 영화 순위를 다시 매긴 뒤 따로 코멘트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이 작업이 최대한 객관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기준이라는 것도 사실상 주관적인 가치 판단에서 벗어날 순 없을 텐데, 딱 거기까지를 주관적인 개입의 마지노선으로 삼으려 합니다. *** 현재 상영중인 모든 영화를 다 다루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불가피하게 ‘박스오피스’ 20위권 내에 있는 영화들만 다뤘습니.. 더보기
[오래된 현재] #2 갈월동의 경계를 따라 걷다 #1 해가 점차 짧아지던 어느 가을날 오후 5시 40분. 서울역을 갓 벗어나 갈월동 정류장에 내려 카메라를 들었다. 올려다 본 하늘엔 짙은 듯 연한 하늘색이 펼쳐져 있었다. 연기처럼 끼어있는 구름들과 함께 '좋은 에너지, 더 좋은 세상'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과연 우리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는 걸까.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믿어야겠지. #2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선 두 나무. 지하철교를 사이좋게 옆에 둔 채 함께 나무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두 나무는 다시 푸르름을 기대하며 앙상해지겠지. #3 늘 무심하게 지나쳤던 '재활용센터'를 발견해 사진을 찍고 오십 걸음을 걸었을까, 짙은 빨간색으로 그려진 글씨 '고물상'을 만났다. 재활용과 고물의 경계는 오십 걸음이었다. 여름과 가을의.. 더보기
<임진왜란 1592> 4편, 합작의 한계와 가능성 [리뷰] 4편 연출 역시 타협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적 제약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겠지만,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난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양보함으로써 얻어낸 결과물의 값어치다. 4편은 1~3편이 보여줬던 기대치에는 부흥하진 못한 느낌이지만, 합작이라는 제한적 환경을 감안해본다면 그래도 선방 이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4편의 초반 도입부 부분은 1~3편의 요약본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존 촬영 분들의 활용이 많았다. 이는 명나라의 현실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기 위한 장치이자, 동시에 부족한 예산의 결과물로 보여줬다. 인상적이었던 .. 더보기
[2016 KBS 드라마스페셜] #0 10주 단막극 안내서 드디어 등장했다, 단막극이. 8월에 시작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올림픽의 여파로 밀렸고, 추석 연휴에도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단막극이 드디어,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2016 KBS 드라마스페셜‘이 오는 9월 25일부터 시작된다. 햇수로 7년째인 KBS 드라마스페셜은 올해 10편이 준비돼 있다. 2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KBS 정성효 드라마센터장은 "진짜 공들여 만든, 진정한 의미의 사전드라마“라고 소개하며 ”이번 시즌을 통해 3명의 PD가 입봉하고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2작품이 공개된다“고 밝혔다. 그는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 시도, 경험이 응축된 것이 드라마스페셜이라고 강조했다. 간담회에서 드라마센터장이 밝힌 대로 단막극의 가치는 상당히 소중하다. 새로운 PD/작가/배우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내.. 더보기
[3인의 현상범들] #7 위대한 허구 [호래.txt] 사진가는 창문을 찍을 수 없다. 만약 낮-실내에서 창문을 찍으면 창문 밖 풍경이 카메라에 담길 것이고, 사람들은 그 풍경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창문을 통과한 이미지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만약 창문에 찍힌 지문이라든지, 창문에 비친 형광등을 사진에 담아 이것이 창문을 통과한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채게 만든다면 사람들은 직접 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안전한 실내에서 사물을 담으려는 작가의 태도를 질책할 것이다. 반대로 밤-실내에서 창문을 찍으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찍힐 것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화상이란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투명한 창문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불투명한 창문이란 그 자체로 창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창문’ 그 자체를 사진에 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