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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침묵의 시선>이 <액트 오브 킬링>에 비해 아쉬운 까닭

별 시답잖은 얘기부터. 내 책장에 몇 권 꽂혀있는 들뢰즈나 푸코, 지젝 등을 본 뒤로 나를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된 ‘확신범’이라고 확신한 친구가 있었다.

언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친구가 내게 사소한 실수를 했고, 속이 좁았‘던’ 나는 쉽게 화를 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나를 달래던 그 친구는 마침내 그 특유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미안해. 진심이야.” ‘진심’이라는 단어 하나에 풀릴 속이었다면 진즉에 풀렸을 터. 그럼에도 잠자코 있던 내게 지쳤는지 그놈이 이어 내뱉은 말은 조롱에 가까웠다. “아, 맞네. 요새는 진심을 믿을 수 없는 시대지.”

 

진심을 믿지 못하는 시대. 그 비아냥은 나를 향하면서도, 사실상 나와 그 친구를 둘러싼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모더니스트를 겨눈 것이었다. 마치 <원티드>(티무르 베크맘베토브, 2008)의 폭스(안젤리나 졸리)와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쏜 총알의 궤적처럼. 그러니까 좀 거창하게 말하면,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이 아이러니하게 사진, 이미지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갑게 소비해버리는 대중을 양산한다고 우려했던 것이나, 유사한 맥락에서 <오늘의 포르노그래피>에서 알랭 바디우가 포르노의 범람을 염려하는 것. 이런 담론들이 향하는 지점은 범람하는 이미지들 속에 ‘실재’할지도 모르는 본질인가. 아니면 ‘실재’할지도 모르는 본질을 가리는 이미지들뿐인가.

 

이제 본격적인 질문. 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 특히, 포스트모던의 다큐멘터리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미지, 표상, 기표들이 난무하는 시대. 기표(이미지)만이 실제하며, 기의(본질, 의미)는 현상일 뿐이라고 믿어지는 시대에서. 얼마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마동석의 날카로운 답변. “요샌 현실에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져도 괜찮아 하지만, 영화에선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면 못 참는다.” 현실은 진짜, 영화는 가짜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가 가득하다. 사람이 지게차에 깔려 죽어도 눈앞의 구급차를 돌려보내고, 아무리 장난일지라도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는 게 현실이니까.

 

다큐멘터리의 역사적 경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애초에 다큐멘터리는 선전, 홍보용 수단이었다. 1930년대 그리어슨은 ‘현실에 대한 창조적 반응임과 동시에 정보, 교육, 선전의 수단’으로서 다큐멘터리를 처음으로 정의했다. 반면, 2차 대전기의 험프리 제닝스와, 그의 영향을 받았던 ‘영국 프리 시네마’는 다큐멘터리가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대중을 담는, 미학적인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주창했다.

 

하지만 현재 이데올로기로서의 다큐멘터리(이를 편의상 ‘프로파간다’라고 부르자)는 구시대적 유물에 가깝다. 이미 다큐멘터리는 이데올로기를, 심지어 메시지 자체를 잃어버리거나 과감히 집어던졌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는 게(이는 ‘리얼리즘’이라고 부르자), 현재 다큐멘터리의 존재근거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 머무른다면, 현실과 영화가 뒤섞여버린 포스트모던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 속에서 다큐멘터리만의 변별점은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벌써 한 물 갔지만, <파라노말 액티비티>(오렌 펠리, 2007), <블레어 윗치>(다니엘 미릭, 에두아르도 산체스, 1999), <REC>(파코 플라자, 하우메 발라게로, 2007) 등 파운드 푸티지 화법의 소위 ‘페이크 다큐’ 혹은 ‘모큐멘터리’ 영화들을 단순히 장르적 실험 혹은 패션으로만 치부할 순 없는 까닭이다.

 

앞 얘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지금 다큐멘터리는 제3의 길이라는 생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걸 짚고 싶었다. 그게 어떤 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프로파간다’와 ‘리얼리즘’ 그 어느 쪽이든 다큐멘터리의 앞길이 막혀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 <침묵의 시선>은 그 막다른 동굴 양쪽에 갇혀있다.

 

1.

 

 

제목처럼 <침묵의 시선>은 시선에 대한 영화다. 단순하게 영화는 1965년 자기 형 람리를 포함해 100만여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가해자들에 대한 아디의 응시다. 그리고 안경 판매업을 하는 아디는 동네주민뿐만 아니라 가해자들의 시선을 교정해준다. 거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메라, 그리고 우리 관객의 시선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침묵의 시선>에서 중요한 건 감독의 시선이다. 그는 영화 전반을 굽어본다. 영화에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투철하게 드러나는 지점들이 많다. 혹시 집에서 영화를 본다면 스피커가 아니라 헤드폰으로 보라고 할 정도로 공들였던 사운드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인데도 굉장히 섬세하고, 다소 인위적인 미장센과 카메라 앵글, 조슈아의 전작이자, 그가 말했듯 다만 <침묵의 시선>의 서브영화쯤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메인을 압도해버린 꼴이 되어버린 <액트 오브 킬링>에서 보였던 그 화려한 색감. 거기다 임흥순의 <위로공단>(2014)이 그랬듯, 종종 삽입되었던 아름답거나 끔찍한 인서트 컷까지.

 

그러니까 <침묵의 시선>은 어떤 인터뷰어의 우려 섞인 질문처럼, 끔찍한 학살을 주제로 한 다큐치고는 너무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 혹은 심미적 완성도는 위에서 다큐멘터리의 두 번째 경로, 즉 험프리 제닝스와 ‘영국프리시네마’로 이어지는 흐름과 맞닿아있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우선 영화는 ‘예술’로 남아야 한다는 신념. 어쩌면 메시지는 미디어를 통해 가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속’으로 전달된다는 벤야민, 혹은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마셜 맥루언에 대한 부정. 이런 영화 속 ‘리얼리즘’의 흔적들은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는 메시지와는 독립적이며, 매체 그 자체에 들인 공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

 

 

그런데 <침묵의 시선>에선 또한 ‘프로파간다’적 양상도 강하게 드러난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비교적 뚜렷하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혹은 전략적이고 효율적인 편집의 효과다.

 

이런 맥락에서 <침묵의 시선>은 <액트 오브 킬링>과 닮았으면서 동시에 닮을 수 없다. 둘 다 관객에게 충격, 동요, 그리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강한 ‘극적 장치’를 활용한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가해자들을 칭송하는 영상을 만든다고 속이곤, 그네들이 과거의 학살을 여전히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는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전달한다. <침묵의 시선>에는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가해자들을 찾아간 아디가, 마치 암살자가 불쑥 칼을 복부에 꽂아 넣는 것처럼, 사실 자기 형이 당신들한테 무참히 죽어갔음을 밝히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둘은 그 출발부터 다르다. 전자는 가해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부터 출발했다. 말하자면 <액트 오브 킬링>은 그 전제부터 가짜였던 셈, 어쩌면 이는 형식적 차원의 페이크다큐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 그리고 극적 충격은 바로 이 형식과 내용의 괴리에서부터 나온다. ‘거짓’이라는 형식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경로를 내용이 처참히 밟아 부숴버린다. 이 영화가 그토록 강렬하고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감독의 의도를 벗어난 구조적 우연 덕이었다.

 

반면 후자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물론 아디가 가해자들을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겨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문제다. <침묵의 시선>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내용과 내용의 충돌을 직접 지시하고 있으니까. 아디가 피해자 가족인지 몰랐던 가해자들과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의 가해자.

 

그 두 순간이 접하는 지점을 위해 영화는 분주하다. 그 순간의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분주히 담는다. 무엇보다 아디가 가해자들의 만행이 담긴 영상을 보는 씬. 한 번에 찍었을 그 씬은  짤막짤막하게 컷된 뒤, 아디가 가해자들을 만나러 가는 시퀀스 직전에 늘 삽입된다. 다분히 전략적인 편집이다. 거기다 해당 영상을 보여주는 와중에 그것을 보고 있는 아디를 쇼트/리버스 쇼트로 몇 번이고 비춘다. 그의 얼굴, 눈가에서 이는 미묘한 떨림.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을 영화가 쥐어짜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형식과 내용의 구조적 균열에서 은은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남긴 <액트 오브 킬링>에 비해 내용과 내용, 그리고 적나라한 편집으로 직접적이지만 미미한 인상정도만 남긴 <침묵의 시선>은 ‘프로파간다’ 중에서도 섬세함이나 세련미가 떨어지는,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다.

 

종합하면 <침묵의 시선>은 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동시에 뚜렷한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드려내는 ‘프로파간다’ 양쪽에 모두 발을 걸치고 있다. 전자에서는 어느 정도 감정적 울림을 주는 등 성취를 이뤄냈지만, 후자에서는 그 적나라함에 오히려 약간의 짜증이 날 정도로 아쉬웠다. 어쩌면 이는 다큐멘터리 자체의 새로운 국면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