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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나의 어머니> 어머니가 남긴 것

마르게리타(마르게리타 부이)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그건 그녀의 ‘리얼리티’인데, 달리 말해 영화감독인 그녀가 연출한 영화가 곧 그녀의 의도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그녀에게 리얼리티는 현실보다 우선하기도 한다. 그녀의 영화에서 공장장 역을 맡은 배리(존 터투로)의 운전씬. 운전하는 척만 하면 되는 배리는 직선 도로를 달리는 상황인데도 핸들을 좌우로 흔든다. 그 꼴을 보지 못하는 마르게리타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배리에게 실제로 운전을 시킨 것. 하지만 앞 유리는 카메라 세 대로 가린 상태다. 앞이 보이지 않은 상태로 운전을 하면서 대사를 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마르게리타의 현실감각은 리얼리티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진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 아다(줄리아 라차리니)가 노쇠해, 죽음을 앞두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죽음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아다와, 그걸 지켜보는 마르게리타의 모습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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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이 영화가 ‘어머니를 보내는 딸’을 그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리뷰를 마르게리타와 엄마의 관계가 아닌, 마르게리타만의 이야기로 시작한 까닭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라, 차라리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것’이다. 비유컨대 이 영화는 죽음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나의 어머니>는 죽음이 지시하는 것을 응시할 따름이다.

 

일단 공간 구성부터 살펴보자. 영화에서는 크게 두 공간이 교차해서 나타난다. 마르게리타가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공장과, 아다가 입원해 있는 병원. 공장씬과 병원씬은 마치 꼬리 물기 하듯 집요하게 서로의 뒤를 쫓는다. 그만큼 둘 사이는 자연스럽지 않게(갑작스럽게) 컷되어있으며,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씬의 전환은 빨라진다. 그런데 이 두 장소를 관통하는 것은 오직 마르게리타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장씬과 병원씬의 편집방식에 대한 열쇠는 마르게리타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문단에서 언급했던 마르게리타의 ‘리얼리티’를 다시 끌어와보자.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냥 리얼리티가 아니라 ‘그녀의’ 리얼리티라는 점이다. 마르게리타가 추구하는 리얼리티는 그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든 허구이든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생각하고 상상한 것이다. 예컨대 그녀의 리얼리티에서는 병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가 아슬아슬 차를 몰 수도,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느리게나마 걸어서 병원을 나설 수 있다. 과거의 나와 대면하고, ‘너는 내가 맞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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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짐작했겠지만, 위의 예들은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마르게리타의 망상 혹은 꿈들이다. 그러니까 공장(마르게리타의 영화)과 병원(마르게리타의 어머니)는 마르게리타가 추구하는 ‘그녀의’ 리얼리티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공장에서 그녀의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그녀가 의도한 대로 이미지, 연기,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은 불가피하게 리얼리티를 제약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기는, 영화는 현실이 아니며 그녀는 오로지 그녀일 뿐이(지 영화에 참여하는 모든 스탭이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공장에서 그녀는 그런 현실적 제약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녀는 감독이니까. 그녀의 리얼리티가 충족될 때 까지 몇 번이고 다시 찍을 수 있으니까. 배리의 운전씬은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마르게리타의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그건 곧 마르게리타의 몽상이다. 마르게리타는 집에서든 공장에서든 잦은 몽상에 빠진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의 몽상이 기본적으로 어머니 아다의 죽음에 대한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인 것은 분명하나, 한결같이 몽상 속 아다는 현실의 아다보다 죽음에서 멀다(현실에서 아다는 병실에 누워있지만, 몽상 속 아다는 걸어 다니는 등).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공장과 병원에서 마르게리타의 리얼리티는 사실상 다르지 않다고. 둘 다 마르게리타에게는 어떤 이상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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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병원의 현실은 공장에서의 현실과 다르다. 공장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병원의 현실은 마르게리타의 리얼리티를 제약한다. 하지만 공장의 현실이 사실상 마르게리타의 손안에 있었던 것과 달리, 병원의 현실(즉, 어머니의 죽음)은 마르게리타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병원에서 마르게리타의 리얼리티와 현실은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건 분명 공장의 경우와는 다르다. 공장에서 마르게리타는 어찌됐건 계속해서 배우들에게 연기를 요구하고, 카메라맨을 질책하는 등 차츰 자신의 리얼리티를 향해 개선해나간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공장과 병원은 포개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원에서 멀어지는 리얼리티와 현실, 즉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어머니의 죽음 사이의 괴리가 공장의 리얼리티와 현실에도 영향을 스멀스멀 끼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다시 배리의 운전씬으로 돌아가 보자. 리얼리티를 위해 현실감각을 잊었던(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서 배리에게 차를 직접 몰게 했던) 마르게리타는 곧 자기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이후 성질을 내면서 스탭에게 내뱉는 대사가 중요하다. 대충 “멍청한 감독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였는데, 이 말은 자책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엄정한 인식이다. 비유컨대, “내가 잘못했어.”와 “나는 잘못을 저지르는 놈이야.”의 차이랄까.

 

이후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자, 공장과 병원이 포개지는 결정적인 장면. 공장에서 배리는 대사 한 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몇 번의 NG를 낸다. 마르게리타는 참다 참다 버럭 화를 낸다. 대사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느냐고. 다음 씬. 병원에서 아다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자 마르게리타는 아다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휠체어까지 부축하려 한다. 하지만 아다는 힘들다며 포기한다. 그러자 어머니 앞에선 늘 담담하던 마르게리타가 꽥 소리를 지른다. 세 발짝만 걸으면 되는데, 그걸 못하냐고. 울음을 머금은 고함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엉엉 우는 마르게리타 앞에서 아다는 망연히 서있다 가만히 딸을 안는다.

 

앞선 공장에서의 고함은 (기본적으로는 분노의 표출이겠지만) 영화의 완성을 위한 ‘버럭’이다. 하지만 병원에서의 고함은 호전은커녕 악화일로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딸의 ‘비명’이다. 그런데 이 둘이 유사하게 이어진다. 그건 어쩌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영화를 감독하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어머니의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암시하고 있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 그녀가 품고 있는 이상, 즉 리얼리티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과연 다른 이들을 괴롭히면서까지 추구했던 리얼리티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녀의 리얼리티라고 하는 건 한갓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후 배리가 술을 사들고 마르게리타의 집에 찾아온다. 식사를 하다가 그는 사실 기억을 잘 못하는 장애가 있다는 고백을 한다. 그런데 마르게리타는 이상하리만큼 반응이 없다. 배리의 그런 고백은 곧 그녀의 리얼리티를 방해하는 현실적 제약의 원인을 깨닫는 순간인데도 말이다. 술자리가 이어지다 배리는 마르게리타가 촬영장에서 종종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말을 마르게리타의 딸에게 말해준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마르게리타는 답한다. “나도 모르겠어.” 이 말은 사실상 그녀가 추구해왔던 리얼리티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의미심장하다. 아니, 애초에 리얼리티라는 것은 없었다는, 리얼리티는 몽상이었다는 고백일 수도.

 

 

어머니의 죽음은 마르게리타를 (이런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영화는 영화 속 영화, 즉 마르게리타의 영화로부터 시작하지만, 끝은 눈물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마르게리타의 바스트샷이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마르게리타의 시선(마르게리타의 영화를 찍는 카메라)에서 시작해 마르게리타를 향하는 시선으로 끝나는 셈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의 형식적 대조는 마르게리타의 격렬한 변화를 은유한다.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