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먼저 고백부터. 나는 이 영화를 계기로 처음으로 홍상수를 만났다. 그래서 이전까지 몇몇 사람들이 홍상수 예찬론을 펴도 솔직히 공감하지 않았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자칭 홍상수 팬을 자처하는 분들의 비판이 두려워서다. 그래도 홍상수 감독은 다양한 해석을 좋아한다 했으니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차피 이렇게 밑밥을 깔아도 비판과 비난은 있을 수 있다. 모두 환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감상할 때 그렇듯 나 역시 제일 먼저 제목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지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뒤 처음 느낀 감정은 혼란이었다. 내게 있어 이 영화는 적어도 ‘지금’과 ‘그때’, ‘맞고’ ‘틀리다’를 규정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래서 난감했다. 뭘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감이 안 오는 영화였다(원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전부 그런지는 모르겠다, 본 적이 없으니).
영화는 크게 2부로 구성돼 있다. 먼저 1부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타이틀 아래 서사가 전개된다. 그리고 2부에서는 약간의 변주를 가미한 채 1부의 인물, 사건, 배경이 반복된다. ‘약간의 변주’라고 한 이유는 2부에서 완전히 새로운 결말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변주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으로 작용한다.
1. 지금과 그때
사실 이 영화에서 가리키는 지금과 그때는 명확하지 않다. 그때가 1부인지, 지금이 2부인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여하튼 1부와 2부나 주요 사건은 같다. 영화 특강 차 수원에 오게 된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 분)는 우연히 윤희정(김민희 분)을 만나게 된다. 춘수는 희정에게 반하고 어떻게든 꼬셔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춘수는 먼저 희정에게 말을 걸고, 희정의 작업실에 들르며, 함께 술을 마신다. 하지만 춘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희정은 알게 되고 춘수의 일탈은 실패로 귀결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유부남의 뻔뻔한 수작을 드러낸 영화로만 치부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2부가 다시 상영될 때 1부가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지루한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기우였다. 홍상수는 변주의 새로움이 반복의 지겨움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었다. 2부에서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카메라 구도와 소품이 조금씩 달라지고, 인물의 성격이 보다 진솔해졌다. 그 결과 나는 2부를 1부의 변용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써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역시 춘수의 성격이다. 먼저 1부에서 춘수는 희정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 좋다고만 한다. “너무 예뻐요”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희정의 그림을 보지도 않은 채 그저 “너무 좋다”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말하는 춘수는 한 마디로 속물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그가 유부남이라서가 아니다. 솔직하지 못한 그의 태도는 속마음을 나타내는 춘수의 내레이션을 통해 더 강조된다. 어리고 예쁜 조연출 염보라(고아성 분)를 바라보며 “조그만 게 너무 예쁘다”라고 말하거나 희정이 다른 선약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방금 전까지 완전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식으로 말이다. 방수영(최화정 분)의 폭로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희정에게 들켰을 때 당황하는 춘수의 모습은 속물적인 캐릭터의 말로를 잘 보여준다.
그에 비해 2부의 춘수는 좀 더 진솔하다. 물론 그렇다고 희정의 마음을 얻기 위한 구애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만하지는 않는다. 희정의 그림에 대해서도 좀 더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1부에서는 희정의 그림을 보지도 않은 채 평가를 내렸던 그가 2부에서는 그림을 보고 냉정히 말한다. 그냥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그림”이라고. 또 친구가 없다는 희정에게 아무렇지 말한다. “그래 보여요”라고. 결정적으로 춘수는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다. 자신은 이미 결혼해버린 몸이라고. 물론 이 같은 춘수의 진솔한 태도가 영화의 결말까지 뒤바꿔놓지는 못한다. 하지만 마치 나비효과처럼 이 작은 변주는 장면의 변화를 가져온다.
2. 맞고 틀리다
춘수의 진솔한 태도로 인해 2부에서는 몇 가지 새로운 장면이 추가된다. 먼저 앞서 언급한 대로 춘수가 희정의 그림을 비판하면서 희정은 속이 상한다. 당황한 춘수는 작업실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며 묻지만 희정은 안된다며 그를 작업실 옥상으로 데려간다. 이 지점은 1부에서 찾을 수 없던 장면이다. 옥상에서 희정의 집을 가리키며 희정은 과거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 한 번 도둑이 들었을 때 아무것도 훔쳐간 게 없었지만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는 기이한 일화다.
짧게 언급됐지만 나는 이 도둑 이야기에서 2가지 의미를 유추해봤다. 1부에서 없던 장면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도둑 이야기는 이후 춘수와 희정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이 경우 도둑은 춘수를 가리킨다. 춘수는 희정의 마음을 훔치려 했지만 결국 훔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맞고 틀리다’에 대한 전복이다. 도둑이 들었지만 아무 것도 훔쳐간 것은 없다는 사실은 ‘집에 도둑이 들었다’와 ‘집에 도둑이 들지 않았다’는 두 가지 말로 모두 표현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의 제목 역시 뒤틀릴 수 있다. 1부와 2부에서 춘수와 희정은 다른 방식으로 만났지만 결국은 헤어지고 만다.
도둑 이야기 외에도 춘수의 진솔한 태도는 결말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를 빚어낸다. 우선 1부에서는 춘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수영에게 들었던 희정이지만, 2부에서는 이미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이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갑작스레 춘수가 술자리에서 옷을 벗었다는 수영의 전화를 받고도 충격을 받지 않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다. 급기야 희정은 춘수에게 볼에 입술을 맞춘 뒤,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다시 나오지는 않지만 희정은 다음날 춘수의 영화를 보러 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난다. 마지막 장면은 눈길 속 홀로 걸어가는 희정이다. 그들은 끝내 헤어졌지만 1부의 결말(희정은 춘수의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과는 사뭇 다르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진솔한 태도를 가진다고 해서 지금이나 그때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솔한 태도로 말미암아 가져오는 변화는 결코 미미하지 않다. 남자는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고, 여자와 헤어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는 남자의 기만에 의해 상처받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결코 받아줄 수 없는 진심이었지만 여자는 받은 진심을 잠시나마 자신의 진심으로 돌려주었다. 2부의 결말이 1부의 결말보다 왠지 모르게 더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아마 그것은 춘수의 진솔함 때문일 것이다.
결국 ‘지금이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말은 명확한 답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가치관에 따라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다’나 ‘지금이나 그때나 틀리다’라는 말도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인 이유는 그게 더 떳떳하고 아름답다고 느낌 감독의 판단 때문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든 현실이든 기만은 ‘틀리고’ 진솔함은 항상 ‘맞다’고 생각한다.
by 락
*사진 출처: 영화제작전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