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먼저 근황부터.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 말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참 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결국은 동어반복에 기댄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수습을 해야 한다. 그게 고의든, 실수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일과 관계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소통이 되지 않는 것만큼 막막한 일도 없지만 어제부로 나는 카카오톡을 삭제했다. 삭제의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차라리 그게 더 속 편할 것 같아서다. 막상 노란 창이 사라지니 문득 불안해졌다. 하지만 곧이어 온전히 내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분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와중에 본 영화가 <사도>였다.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당분간 카톡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사도세자 이야기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수차례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소재다. 그래서 영화의 초점은 뒤주 안의 이야기가 아닌 뒤주 밖, 혹은 전의 이야기에 맞춰져 있었다. 마치 이별 이야기의 핵심이 헤어지며 겪는 일상이 아니라 헤어지게 된 계기에 있듯이 말이다.
결국 영조(송강호 분)와 사도(유아인 분)의 갈등에 우리는 자연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칼을 든 사도가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후 잠깐의 적막 후 영조에 의해 사도는 뒤주에 갇힌다. 이후에는 현재-과거-현재-과거 식의 순차적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결국 이 구성에서 관객은 과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사도는 계속해서 뒤주에 갇혀 있을 뿐이니 말이다.
영조는 사도를 (영화에서만큼은) 참 극진히도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영조의 첫째아들 효장세자는 일찍이 죽었고, 영조가 마흔이 넘어서 영빈(전혜진)에게서 얻은 자식이 사도다. 거기에 어려서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영조는 사도를 어여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밤을 새워 사도를 위한 책까지 썼다. 사랑을 받고 자란 사도도 영조를 생각하는 마음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것이 어그러졌을 때 광기도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사도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사도는 미치지 않았다. 영조가 탕평이라는 명분 아래 신하들 눈치를 보는 사이 사도의 마음은 상처 입었을 뿐이다. 비록 비뚤어진 마음이 생기긴 했어도 정사를 내팽개치거나 영조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가 미치게 된 표면적인 계기는 인원왕후(김해숙 분)의 죽음 뒤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미치게 된 건 영조의 일관된 태도에 있다. 바로 존재의 부정이다.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보다 더 참담한 기분이 드는 건 존재 자체를 무시당했을 때다. 특히 그 상대가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사도에게 영조는 왕 이전에 아버지였다. 그는 종묘에서 영조가 의미심장하게 꺼낸 “왕가에서는 자식을 원수처럼 기른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사실 그가 바란 건 왕이 아닌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다.
그랬기 때문에 사도의 광기와 기행은 필연적이었다. 대비와 중전의 사후 영조뿐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 모두가 사도의 존재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그를 가르치던 스승 3인 모두가 세자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올리라는 영조의 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결했으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져서) 그는 결국 광인이 될 수밖에 없는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광인이 된 이유는 영조의 말처럼 그가 세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존재를 완전히 부정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람이 미치는 건 시대보다는 인간관계와 관련이 깊다.
영조는 사도에게 공부와 예법을 항상 강조한다. 왕이 무지하거나 옷을 단정히 입지 않으면 신하에게 무시당한다는 게 그 이유다. 사도는 반문한다. 사람이 있고 그 후에 예법이 있어야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영조는 화답하지 않고 그 결과 그는 아들을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왕이 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사정 따지지 않고 그 사실만 놓고 보면 영조 역시 예법과는 거리가 먼 임금이었다.
유독 이 영화엔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혜경궁 홍씨(문근영 분) 역시 마찬가지다. 홍씨가 사도의 기행을 말릴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실제 역사가 어떤지 몰라도 영화 속에서 홍씨는 사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는다. 놀랍도록 냉정을 유지한다. 언뜻 보면 영조와 가장 닮은 모습이다. 둘은 우선순위가 확실하다. 영조는 오직 안정적인 왕권 계승을 통한 조선의 명맥 유지를, 홍씨는 자식인 세손의 안위만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사도의 광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영조 입장에서는 사도가 죽어야 세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이미 반역을 꾀한 혐의를 받는 사도다. 그가 사약을 받으면 사도는 역적이 되고 그 아들인 세손 역시 역적이 되기에 사도는 반드시 뒤주 안에서 죽어야만 한다. 홍씨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도가 칼을 들고 경희궁으로 향한 날 영빈을 찾아가 사도의 역모 사실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결국 사도의 죽음은 영조와 홍씨의 이해관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인지도 모른다.
사도가 죽은 이후에도 영조와 홍씨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영조의 눈물은 관객들을 울음바다로 만들었지만 사실 그뿐이다. 영조는 사도가 죽은 이후 궁으로 돌아가며 개선가를 울리고, 몇 년 후엔 사도의 기록을 모두 없애 세손이 왕좌에 오르는 데 불편함이 없게 한다. 홍씨는 아버지의 상을 지켜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는 세손의 뺨을 때리며 세손을 왕으로 만든다. “사람 위에 예법 있냐”는 사도의 절규가 다시금 오버랩 되는 순간이다.
3. 독한 사람들
참 독한 사람들이다. 세자가 죽어야 세손을 살릴 수 있다는 논리나, 세자가 죽어야 아비를 죽이려한 파렴치한 왕자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나 결국은 자기논리다. 냉정히 말해 끔찍한 일을 가리기 위한 나름의 명분일 뿐이다. 어차피 역사에는 모두 다 기록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슬픔을 애도한다”는 뜻의 사도라는 말을 덧붙여도 비극은 수습되지 않는다. 죽은 뒤에 애도한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닐 테니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영조의 잔혹성이나 사도의 광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람이 어떻게 광인이 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보듯 사람이 미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다. 광인을 만드는 건 결국 그를 둘러싼 타자들이다. 광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결국 책임에서 회피하기 위해 광인이라는 괴물을 호명해낸다. 그래서 광인의 눈에는 그들 역시 광인으로 보일 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선이 아닌 ‘헬조선’에 사는 우리는 미쳐버릴 것 같은 일을 겪어도 쉬이 미치지 못한다. 정신 줄을 놓아버리기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지금 할 일도 너무 많이 쌓여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사도가 (처지가 아닌 마음가짐에서) 부럽기도 했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저 화살을 보아라. 얼마나 떳떳하니.” 독한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 말, 참 낭만적이다.
나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목표(예법)가 사람보다 우선될 수 있을까? 사람을 저당 잡은 채 이룬 목표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각자 살아온 인생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엔 정답이 없다. 물론 내 대답은 No지만. 영화를 본 후 각자의 대답을 찾길 바란다.
by 락
*사진 출처: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