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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맥주. 혼자.

 

 

항상 마음속의 이상향을 그리며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지만 정작 몸이 묶여 있을 때가 많다. 대개는 금전적 문제였지만, 금전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이제는 마음이 닿는 목적지가 없다. 답답할 때마다 내일로 티켓을 끊고 어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일 없이 바삐 몸을 놀려 기어코 반도를 이리저리 헤집어 놓는 방식으로 여행을 가는 것 역시 채울 수 없는 방랑벽이 주는 헛헛함, 그 때문이다. 반도인(半島人)은 외롭다. 김연수가 말한 ‘국경’의 정의 아래의 나는 제대로 된 일탈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후일담을 들어보니) 출장차 워싱턴과 멕시코와 쿠바로 떠나셨던 교수님이 시험을 한 주 빨리 보신 탓에 주어진 시험 기간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신나서 이곳저곳 전화를 해보지만, 사실 놀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모두가 아등바등 사는 시대에 나만 홀로 태평하다. 아무리 <모모> 속 카시오페이아처럼 살려고 맘을 먹는다지만, 나만의 시간이라는 것은 때론 꾸역꾸역 차오르는 검은 물과 같이 징그럽다. 뭐 그래도 끝났으니까, 오늘은 괜찮겠지. 자기만족의 차원에서, 으레 그렇듯이 책을 꽉꽉 채워 빌려 빵빵해진 가방을 메고선 고민을 한다. 맥주나 한 잔, 해볼까.

 

분명 지도를 켜고 보면서 따라갔음에도 역시나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가 ‘혼술’로 유명한 술집을 찾았다. 뭔가 깜깜한 한옥은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와 같은 구조. 눈으로 대충 자리들을 스캔한 후에 염치를 무릅쓰고 4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방으로 혼자 들어간다. 무엇인가를 매조지은 후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맥주를 시킨다. 이곳의 맥주는 비싼 편이지만, 도토리 다람쥐 모으듯(잘못 쓴 게 아니다!) 깨작깨작 모은 돈은 아직 스스로에게 맥주 한두 잔 사줄 만큼 부족하진 않다. 슈나이더 마인 호텐바이세 탭이라고 쓰인 - 밀맥주와 IPA 혼합 - 을 한 잔 시킨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밀린 랭보를 꺼내 읽는다. 무의미한 글자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했던 시구들이 술 한 잔을 걸치자 머리를 콕콕 찌른다. 아무리 마음이 말랑해져도 그렇게 센치해질리는 없는데, 역시 피곤한 탓인가 보다. 공복의 알코올은 혈관을 타고 빠르게 흐른다. 비싸지만, 한 잔 더.

 

 

거의 후식주처럼 돼버린 린데만스 뻬슈레제는 복숭아 주스 같은 맛이다. 처지에 걸맞은 - 뻬슈레제는 죄인이라는 뜻이다 - 그 경계의 무엇을 홀짝홀짝 마시며 나머지 문장들을 읽는다. 술김에 적어놓은 페이지들을 죄다 필사하려면 또 한 동안 키보드 앞에서 떠나지 못할 테지만, 그렇게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박아 넣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죄가 많은 세상에서 죄를 지은 죄인은 그렇게 스스로의 형량을 더한다. 지옥에 내가 있는가, 아니면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인가. 내 정체성은 아하스 페르츠인가, 아니면 아리만인가. 나는 그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채로, 갈 수 없는 독일과 벨기에 풍의 맥주들을 마시며, 혼자서 책장을 덮는다.

 

더해진 죄의 무게만큼 가방이 무겁다.

 

 

B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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