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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3. 유진과 낙원

 

안국에서 낙원상가, 명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묘한 분위기들이 서로 중첩돼 있는 공간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정점과 철 지난 과거 사이로 수많은 시간이 지나간다. 천도교 본당과 운현궁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풍경들이 펼쳐진다. 거리를 걷는 대부분의 이들이 노인들이다. 장기 두는 이들과 서예 글씨를 쓰는 사람들 주위로 수많은 노인들이 모인다. 노인들이 다른 연령층보다 월등히 많은, 이 다소 기이한 풍경은 어쩌면 내가 아는 낙원의 매우 작은 조각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특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낙원상가 주변은 주변의 비싼 물가를 감안해보면 상당히 저렴한 편. 송해 ‘선생님’이 자주 들린다는 2,000원 남짓 국밥집들이 좁은 골목길을 끼고 쪼르르 모여 앉아있다. 조금 더 뒤편으로 가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지만 낮에는 조용한 포장마차 골목이 나타나기도 한다. 평범해 보이는 가게들 중에는 간혹 “이발 4000원”이나 “통닭 5000원”과 같은 믿을 수 없는 장사를 하는 곳들도 있다. 탑골과 낙원 사이의 공간은 말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한국에서 드문 노인의 도시다.

 

냉면을 좋아해서 주교동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 저녁 여덟시 반에 사는 것이 버겁다고 종로3가에서 걸어가곤 하니까 - 아무래도 주교동은 자주 가기에는 가격이 버겁다. 먹을 때마다 만족하지만 주머니 사정이란 거의 언제나 그렇듯 빠듯한 법. 가난한 이는 그래서 요 근래 냉면이 먹고 싶을 때면 유진을 찾는다.

 

탑골공원 뒤편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유진은 여느 낙원 쪽 가게들이 그러하듯 가격이 저렴한 편이다. 설렁탕 4000원, 수육 5000원이라는 가격이 오히려 주변 시세보다 비싸다고 느껴질 정도. 가게는 유명세에 비해 허름한 편이고, 간혹 젊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는 냉면집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연령대도 높은 편(30대 이상이 주 고객층이란 느낌)이다.


냉면은 7,000원. 보통 가게에서 파는 냉면하고 가격이 비슷해서 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평양냉면”이 맞는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

 

그러나 유진의 진가는 그 모든 분위기를 이겨내고 냉면을 받아드는 순간 나타난다. 쇠고기향이 물씬 나는 진한 국물은 남기기가 아쉽고, 직접 내리는 메밀면은 순면은 아니지만 메밀 향을 머금은 면발이 살짝 질긴듯 하면서도 적당히 톡톡 끊어진다. 김치가 전반적으로 쓴맛이 나서 맛이 없는 편이지만, 그 또한 나오지 않으면 섭섭하다. 일반적인 평양냉면보다는 사실 주교동식 서울냉면에 가깝지만, 고기집에서 장난처럼 내놓는 냉면과는 분명 다르다.

 

자주 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긴다. 여느 때처럼 냉면을 먹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한테서 냉면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어쩔 수 없는 합석(유진은 자리가 많지 않다)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 동안 졸지에 현대 사옥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오해받기도 하고, 영영 얼굴을 알지 못한 친구들의 모임에 대한 얘기도 듣고, 생전 처음 봤던 그분의 딸의 유학 이야기도 들으며 명함을 받기도 했다. 동시에 유진은 늦은 밤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 혼자 조금 나어린 막내로 냉면과 설렁탕과 수육에 술을 마시며 삶이며 영화며 음악 이야기와 같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동시에 유진은 평범하게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칠 때마다 짧은 버스 환승 시간을 활용해 혼자서 허겁지겁 허기를 때우는 곳이기도, 그러면서도 동시에 주변 아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숨은 맛집이라며 언제 한 번 꼭 같이 가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건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유진의 냉면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유진이 단순한 냉면가게가 아닌 기억의 공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냉면을 좋아해 찾아갔지만, 그 단순한 냉면에 기억이 덧입혀지는 순간 그 작은 점포는 기억의 도시 중의 일부로 탈바꿈했다.

 

안국을 떠나고 나서도 돌아올 일이 있을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처음 봤었던 사장님처럼 지금의 내 나이 때의 처음 보는 청년에게 냉면과 수육을 사 나눠먹으며 나중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밥을 사주는 것으로 갚으라는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혹은 다시 왁자지껄한 그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 밤에 소주 한 잔에 냉면을 말면서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늙어갈 수 있을까. 허겁지겁 시간을 마는 대신 낙원의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늦은 막차 걱정까지도 훌훌 털어버린 채 느긋하게 기억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올까. 같이 늙어갈 수 있을까. 그 때까지 유진은 시끄러운 도시 개발의 광풍에서 벗어나 낙원 뒤편에 있어줄까. 낙원이 되어줄까.

 

유진과 낙원, 혹은 유진의 낙원. 또는 낙원(樂園)의 유진은, 변하지 않고 나의 바람대로 언제까지고 남아줄까.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이 도시에서, 늙는 것이 죄처럼 느껴지는 이 나라에서

 

술을 먹지 않고도 술에 취한 듯 글을 쓴다.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