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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6. “말아 먹는” 대신, 따로

 

운수가 나쁜 날이다. 마음먹고 밤을 새려다가 애매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만 못 잤다. 23일 혼자 잠까지 줄여가며 끙끙대며 준비한 글은 방향이 틀렸으니 오는 금요일까지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얘기나 들었다. 마음이 급하니 캔 커피 하나가 점심이 됐고, 그 사이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다. 뜬금없이 세계의 끝을 생각하며 지쳐 집에 가는 길, 하필이면 노트북을 버스에 놓고 내리는 바람에 다시 추운 가을 밤 타고 온 버스를 찾아 한참을 헤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만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피곤에 절어 집에 가는 길, 간만에 마음이 동해서 긴긴 귀로 중간을 끊어 밥집에 간다. 정말 좋아했던 국밥집이 사라진 지금, 항상 그대로일 것이라 기대하며 갈 수 있는 식당은 이제 몇 개 남질 않았다. 역사 5분 거리, 2층에 있는 가게는, 한참 만에 찾아갔지만 그래도 그대로다.

 

가방과 노트북과 옷을 구겨 넣은 쇼핑백을 앞자리에 던져놓고 후드티를 벗는다.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면서 밥을 기다린다. 금방 나온 국밥은 양지를 삶아 만든 맑은 국물에 고추기름이 살짝 둘러져 있고, 파와 마늘과 콩나물과 선지가 든 단출한 것이다.

 

밥은, 따로. 뚜껑을 연다. 하얀 밥이 고슬고슬하니 좋다

 

따로 국밥은 단순하지만 생각 외로 선택의 여지가 많은 음식이다. 여느 국밥처럼 밥을 국에 말아서 먹어도 된다. 되도록 국물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면 밥을 한 숟갈 크게 퍼서 국에 살짝 적신 다음 먹음 그만이다. 혹은 밥 한 숟갈을 뜨고, 젓가락을 들어 김치를 입에 베어 문 다음, 다시 숟가락을 들어 탱글탱글한 선지를 먹기 좋게 잘라 국물과 함께 먹어도 좋다. 푹 끓여진 파와 콩나물만 젓가락으로 따로 집어 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반은 말고, 반은 적셔 먹어도 된다. 밥을 남기거나 국물을 남겨도 너저분하지 않다. 비록 어떻게 먹어도 같은 맛, 같은 음식이지만 단순히 밥이 말아져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를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니 몸이 힘들고 마음이 괴롭다. 삶이 자연스럽지 않으니 말라는 국밥은 안 말고 자꾸 인생만 말아 먹는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든다. 눈앞에 당장 놓인 선택지만 단순하게 보고 살 수 있다면, 쓸데없는 일들에 자꾸 좌절하고 우울해지는 일은 좀 줄어들지 않을까. 비록 근시안적이라고 해도, 스스로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는 앞만 보고 걷는게 모든 걸 한 곳에 몰아넣고 감당을 못해 헤매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조금씩 그릇을 비우면 되는 게 아닐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됐다고 삶에 회의감이나 느끼는 대신, 당장 오늘 저녁에 글이나 새롭게 고쳐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헤쳐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트럼프의 임기도 끝날 날이 오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를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아직 따끈한 국물에 후추를 살짝 뿌린 후, 한 천 년 만에 끝까지 들이켜 본다.

 

뭐가 됐든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다. 괜히 조급하게 굴다가 인생을 마느니, 국밥이나 말아야지. 차근차근, 한 숟갈씩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