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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플라워>를 관통하는 질문. 왜 하담(정하담)은 그렇게까지 살고자 애쓰는가. 그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해답은 놀랍게도 도입부에 이미 짜여있다.

 

나만의 답변. 영화에서 하담은 얼핏 외계인의 처지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결코 외계인이 아니다. 차라리 하담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외계로 내던져졌지만 어찌어찌해서 다시 돌아온, 말하자면 ‘외계인이 될 뻔한 내부인’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아리송한 결론을 맨 앞에 두었다. 여기서 끝내면 혼잣말과 다르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같은 말을 다만 길게 늘려보겠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는 말은 다 부연이자, 혹 첫 문단에서 ‘아’ 느낌이 왔다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며, 결정적으로는 아래 이어지는 내용이 고리타분할 가능성이 농후하리라는 경고다.

<스틸 플라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담의 뒤, 옆, 그리고 가끔 앞을 좇는다. 달리 말해 <스틸 플라워>는 전적으로 ‘하담을 입체적을 다루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는 특히 도입부에서 하담을 둘러싼 어떠한 설명도 삼간다.

 

문득 떠오르는 또 다른 영화. 공주(천우희)를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 미지의 정보를 파편적으로 내던지는 <한공주>(이수진, 2013) 도입부의 불친절함은 <스틸 플라워>의 시작부터 솟아오르는 어떤 강렬한 데자뷰와 맞닿아있다.

 

그럼에도 <스틸 플라워>는 낯익은 듯 낯설다. 달리 말해 <한공주>와 <스틸 플라워>의 시작점에서 드러나는 결은 비슷한 듯 다르다. 비유컨대 <한공주>가 맞춰지지 않은 퍼즐이라면 <스틸 플라워>는 점 하나가 찍힌 흰 도화지랄까.

 

<스틸 플라워>의 첫 시퀀스. 매우 짧은 쇼트들은 하담의 모습들을 기어코 이어 담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정보랄 것도 없다. 하담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어 보인다. 조각조각을 큰 그림을 맞춰 옮기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 퍼즐과는 달리 흰 도화지에서는 점 하나를 어디에 찍든 상관없으니까.

 

우리가 첫 시퀀스에서 하담을 바라보는 것은 흰 도화지에 작은 점 하나가 찍히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하담은 어찌됐건 하필 거기서 캐리어에 짐을 넣고 바닷가로 향할 뿐이다. 그 쇼트들에서 해석의 여지란 ‘제로’다.

여기서 잠시 조금 다른 얘기. 

 

감독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하담을 그 속으로 집어넣었고, 반대로 하담은 영화 속에서 비로소 존재한다. 그러나 터미네이터나 E.T. 등 외계인과 하담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담은 애초에 이 지구에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데 있다. 현존재와 존재, 혹은 현상과 본질의 딜레마. 이를테면 이것은 영화, 더 나아가 허구의 자기모순이다. 

 

이렇게 이해해보자. 하담은 감독에 의해 비로소 영화 속으로 불려나와 존재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영화가 아니라면 하담의 존재 자체를 추측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담이 영화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순간 그에게는 영화의 시간, 프레임을 벗어난 모든 가능성이 주어진다. ‘그는 도대체 왜 허겁지겁 짐을 싸고 바다를 마주하는가?’라는 우리의 첫 질문은 하담의 불가능한(영화 이전의) 시간에 가닿는다.

 

이런 식으로 하담의 존재를 에둘러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혹은, 수나 있었던) 것은 앞서 살폈던 <스틸 플라워> 도입부의 불친절함, 더 나아가 하담의 어떠한 정보도 삼갔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얘기들을 종합해보자.

다시 첫 시퀀스. 허겁지겁 짐을 싼 뒤 하담은 부둣가 아래 설치된 수면 높이의 철판 위에서 빙빙 돈다. 뭔가 결심한 듯 바다 쪽을 향해 망연히 걸어가다 멈춰 선다. 그 다음 씬. 하담은 다시 도심에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담의 그 무엇도 짐작할 수 없지만, 하담이 결코 외계인이 아니며(터미네이터나 E.T.와는 다르며) 그렇다고 하담이 영화의 시간 이전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즉 하담은 영화 속 세계의 내부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그가 황급히 바다를 향한다. 여기서 바다는 다른 세계(죽음, 혹은 외계)의 은유다.

 

달리 말해 하담은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내쳐진다. 여기서 내쳐진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담은 한공주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담은 퍼즐이 아니라 도화지에 찍힌 점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이는 곧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것이 감독이든, 신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하담의 모든 행동은 구조적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다.

 

그 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세계의 끝까지 몰린 하담이 결국 다시 제 세계로 돌아오고 영화는 그제서야 스크린에 제목이 떠오른다.  

제목이 그렇듯, ‘강철 꽃’과도 같은 하담이 이 세계에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그렇게도 고군분투해야만 하는 까닭, 그리고 끝내 기죽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에너지의 뿌리 깊숙한 곳에는 바로 ‘외계인이 될 뻔한 내부인’으로서 그의 흔들리는 정체성이 있다.

 

 

by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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