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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아메리칸 스나이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단편적 정보란 얼마나 치명적인가. 그걸 무턱대고 받아들인 나는 또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뜬금없지만 자기고백으로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었으니까. ‘애국주의와 소영웅주의가 뒤범벅된 영화가 또 하나 나왔구나.’ 전설의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리 잠정적(이라 쓰고 확고한) 결론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짧은 평가들을 보며 나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대중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명확히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영화를 칭송, 또는 비난했다.

 

어느새 나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해서라면 적극적인 안티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그 자체로 ‘이라크=악, 미국=선(혹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에 대한 나의 혐오를 표상했다. 그러니까 사촌동생이 “<아메리칸 스나이퍼> 봤어? 크리스 카일 죽이더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을 때, 나는 대뜸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훈계를 가득 담은 말투로 동생의 영화(또는, 세계)관을 바로잡기 위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 영화가 할리우드, 즉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무지막지한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9.11 이전 이라크와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 찾아본 적 있느냐? 동생이 이 말들을 이해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형으로서 뿌듯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건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꼽은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올해 상반기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버젓이 들어가 있었던 것. 뒷목을 부여잡고 영화를 찾아 봤다. 이내 ‘참사’를 불러온 나의 섣부름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또, 돌이킬 수 없는 과거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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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다. 미국식 애국주의, 소영웅주의를 떠받치는 종래의 영화들과는 결을 전혀 달리 한다는 말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차라리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이다. 영화에서 크리스 카일이 배제된 씬은 단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크리스의, 크리스에 의한, 크리스을 위한 영화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리고 크리스 카일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물음에 ‘성조기’, ‘미국’, ‘아메리카’, 또는 반대로 ‘이라크’, ‘이슬람’ 등을 떠올린다면, 아쉽지만 영화의 본질을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식 애국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의 비난은 이렇게 잘못된 판단에 바탕을 두고 있다.

 

크리스의 실존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미국(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미국 본토를 공격한 무슬림 극단주의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파병에 참여한다. 이후 가족에게 소홀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내걸면서까지 수차례 이라크로 향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전설적인 스나이퍼들 간의 개인적 대결양상으로 초점을 돌리긴 하지만, 결국 그가 이라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라이벌 의식보다는, 속절없이 죽어가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크리스의 이러한 대의명분은 비유컨대 포장지에 불과하다. 단단한 듯 보이는 껍질은 그러나 그 속에 무시무시하게 자리 잡고 있는 중핵을 감출 뿐이다. 중핵이란 ‘아버지’다. 영화가 크리스 카일의 정신(의식)이라면, 영화에서 아버지는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크리스의 아버지는 영화 초중반에 짧게 등장하고 말뿐이지만,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나지 않는 모든 곳에 가득히 들어차있다.

 

조금 우스꽝스럽게 말하면,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한 아들의 영화다. 친구에게 맞아 멍이 든 크리스의 동생 제프와, 그 친구를 아낌없이 응징한 크리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양, 늑대, 그리고 양치기개. 약자인 양이나 강하지만 악한 늑대보다는 강하면서도 약자의 편에 서는 양치기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식들을 지긋이 바라본다.

 

크리스는 평생 아버지의 전언에 얽매여 산다. 그는 ‘양치기개’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라면 거침없이 나선다. 그런데 ‘양치기개’의 소명은 어디까지나 적극적 방어에 국한된다. 양을 공격하지 않은 늑대를 해치는 건 ‘양치기개’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악행이니까. 이라크에서 대상을 저격할 때 크리스는 과도하게 머뭇거린다. 그는 뛰어난 저격솜씨로, 상대가 기어이 아군을 공격하려 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방아쇠를 당긴다. 양들을 공격하지 않는 한, 늑대는 결코 적이 아니다. 영화가 꽤나 합리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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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아내(시에나 밀러)를 포함한 가족에 대한 크리스의 무정함이다. 물론, 결혼 초반부와 마지막 시퀀스은 제외하고 말이다. 가장 표면적으로 이해하자면, 그가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환청을 듣거나, 다른 사람들의 동작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더 심층적인 분석도 가능하다. 다시 양치기 비유로. 미국 본토에서, 좁게는 크리스의 가정에서 양-늑대-양치기개의 삼각구도는 없다. 특히, 양치기개로서 크리스가 처단해야 할 늑대가 부재한다. 두 측면에서 그렇다. 일단, 미국에서 크리스는 ‘양치기개=늑대’다. 그는 언제든지 다가올 늑대를 처치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동시에 그의 존재(=부재)는 가정의 불행인 것이다. 그를 떠받치는 삼각구도의 붕괴 앞에서 크리스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하나 더. 비유컨대 이라크가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양 목장이었다면, 미국은 늑대들이 보이지 않아 평화로운 목장이다. 거기서 ‘양치기개’의 존재이유는 희미하다. 다시 아버지의 전언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양치기 비유를 끝은 뒤 연이어 강조했던 점은 ‘양을 도와야 된다’라기보다는, ‘늑대를 흠씬 두들겨 패’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이 없는 상황은 시시한 게임이 되어버린다. 더구나 그는 ‘카우보이’ 출신이 아닌가. 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약자 또한 선이 아니다. 결국 문제는 상황이다. 악한 악이 약한 악을 괴롭히는 상황이 이뤄지지 않는 한, 크리스가 약한 악에 관심을 둘 명분은 사라지는 것이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