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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스티븐 프리어스, <리틀 빅 히어로>(1992)

키워드: 영웅, 의도/비의도, 우연, 진심, 복잡계

1. <리틀 빅 히어로> VS. <엑시덴탈 히어로>

 

1994년 4월 10일 한국에서 <리틀 빅 히어로>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의 원제는 <엑시덴탈accidental 히어로>였다. 한국어로 쓰자면 전자는 <작고 큰 영웅>, 후자는 <우연적인 영웅> 쯤이 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엑시덴탈 히어로>가 더 적확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영화의 핵심을 담은 것은 맞다. 또한 제목이 결코 영화 자체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영화의 일부만을 반영할 수 있기에, 어떤 제목이 옳거나 그르거나 하는 판단은 적절하지 않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적인 차원에서 ‘보다’ 나은 제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빅 리틀 히어로’와 ‘엑시덴탈 히어로’의 결정적인 차이는 ‘콘텍스트에 대한 고려의 여부’에 있다. ‘작고 크다’는 수식은 형식논리상 모순이기에 하나의 명확한 이미지로 나타내긴 어렵다, 그럼에도 ‘작고 큰 영웅’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형상 묘사에 머무른다. 이를테면 노쇠한 아버지를 ‘작고 크다’고 표현할 때 고려되는 것은 현재의, 정적인 아버지라는 개인 그 자체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콘텍스트의 자장 안에 놓여있다. 비유컨대 ‘작고 큰’이라는 수식이 단 한 컷으로 된 그림이라면, ‘우연’은 여러 컷으로 구성된 만화다. ‘우연한 아버지’라고 할 때에는 전후 맥락을 고려한, 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가 떠오른다. ‘우연한 아버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렇게 긴 내러티브가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리틀 빅 히어로>는 무엇보다 콘텍스트, 맥락이 중요한 영화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영화는 의도/비의도, 필연/우연을 능수능란하게 경유하며 영웅이라는 ‘잔상’을 남긴다. 사실상 영화에서 영웅은 없다. 그러므로 정적인 개인을 강조한 <리틀 빅 히어로> 보단, 개인을 둘러싼 구조, 즉 콘텍스트를 강조한 <엑시덴탈 히어로>가 더 적절하다.

 

제목을 바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한국어 표기상 <엑시덴탈 히어로>보단 <리틀 빅 히어로>가 눈에 띄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2. 헐리우드 안에서 헐리우드 밖으로

 

80년대 영국 영화를 대표하는 스티븐 프리어스는 영국과 헐리우드를 왔다갔다하면서 영화를 찍었다. <검슈>(1971), <히트>(1984) 등으로 영국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는 88년 <위험한 관계>로 헐리우드에 진출한다. 하지만 <리틀 빅 히어로>의 절반의 실패 이후 그는 다시 영국에서 <스내퍼>(1993)를 찍는다. 이런 식으로 그는 영국과 힐리우드를 종횡무진했다.

 

헐리우드에서 그의 위치는 애매했다. 영국 뉴 웨이브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헐리우드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풍토에서 나름의 생존전략을 고심했을 것이다.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프리어스. 결국 헐리우드에서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전략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틀 빅 히어로>에서 드러나는 전략은 형식과 내용의 철저한 분리다. 달리 말해, 헐리우드식 형식에 반(反)헐리우드식 내용을 결합한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 적절할 때 깔려주는 웅장한 음악,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리듬감 등.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형식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반면 내용은 어떠한가. 기본적으로 소재가 ‘영웅’이므로, 미국적 정서와 안성맞춤인 듯하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빼어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휘된다. 그는 영웅을 내세움으로써 영웅을 부정한다. 더구나 그 방식은 교묘하다. 결코 대놓고 영응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사건들의 연쇄 끝에 남는 건, 어쨌든 래플랜트(더스틴 호프만)가 취하는 영웅적 제스처다. 그런데 그건 온전히 그의 것인가? 영화가 내내 형상화한 영웅의 비의도성, 우연성의 맥락에 놓았을 때 그 제스처는 우스꽝스러운 무엇이 된다. 영화는 흔히 헐리우드 영화가 그렇듯 온갖 잡다한 장치들을 통해 래프랜트의 비장한 대사 “You’re welcome.”을 강조하지만, 프리어스는 다른 방향에서 그걸 조롱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크게 보았을 때, 헐리우드, 혹은 미국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그는 헐리우드의 외부인으로서, 헐리우드 내부로 들어가 헐리우드의 안과 밖을 냉철하게 가리킨다. <리틀 빅 히어로>의 구조적 이중성도 어쩌면 프리어스의 이러한 자기인식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3. 영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하나 – 우연

 

<리틀 빅 히어로>는 래플랜트나 버버(앤디 가르시아)가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 특히 두 요소를 강조한다. 그건 흔히 떠올리듯 강인함, 정의감, 애국심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우연과 거짓을 부각한다.

그야말로 <리틀 빅 히어로>는 우연의 향연이다. 래플랜트가 아들과 만나러 가는 길에 하필 비가 오고, 하필 와이퍼가 고장 나서 앞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잘못 든 길에 하필 게일(지나 데이비스)가 탄 여객기가 추락한다. 버버는 또 어떤가. 그는 우연히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던 래플랜트를 태우고, 그가 버리듯 건넨 구두 한 짝을 우연히 차에 싣는다. 그러다 그는 우연하게도 뉴스에서 영웅을 수소문하는 것을 듣고는 그게 래플랜트라는 것을 직감하고, 구두를 갖고 방송국에 찾아가 영웅이 된다.

 

우연성의 정도로만 따지만 막장 중의 막장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연은 단순히 극적인 전개를 위한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다. 과잉이란 어떤 점에서는 메타적인 것이다. 비유컨대 물이 가득 따라져 있는 컵을 두고 우리는 컵이나, 거기에 담긴 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마시면 된다. 물과 컵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물이 넘쳐흐르는 순간이다. 물이 넘치는 순간 우리는 물의 양을, 더 나아가 컵의 용량을 생각하게 된다.

 

우연도 어느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우연 그 자체를 메타적으로 가리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빅 히어로>는 정확히 포스트모던한 영화다. 우연이 범람하는 와중에 영웅이 된 래플랜트, 혹은 버버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4. 영웅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둘 – 진짜 거짓 

 

 

영웅이 되기 위해 또 하나 필요한 것은 거짓이다. 그런데 이 거짓이 또 오묘하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무의식의 층위에 있다. 럼스펠드 식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무지unknown unknowns’, 말하자면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무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의문은 ‘도대체 래플랜트는 어떤 유형의 인물인가?’였다. 사람들의 지갑을 훔치고,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가정에도 소홀하다는 점에서 그는 잘해야 ‘한량’이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 (아버지를 구해달라는 소년의 부탁에) ‘자발적으로’ 나선 것도 래플랜트다. 선/악의 이분법을 떠나서도, 그의 행동의 이중성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힌트는 마지막 씬에 있다. 거기서 그는 ‘선행’을 반복한다. 동물원 사고에 직면한 레플랜트는 앞선 비행기 사고에서와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태연하게 경찰을 부르라고, 말하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사고현장을 향해 달려간다. 한 번은 전적인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한 번 더 반복되는 순간 그 행위는 우연으론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결코 그게 의도는 아니다. 달려갈 때마다 보였던 ‘왜 굳이 내가?’, 불만을 품은 듯한 표정은 그런 행위를 그가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래플랜트는 아들에게 “세상은 정글과도 같다.”, “괜히 나서서 남을 도와주려 하지 마라.” 따위의 말을 한다. 결국 그가 결정적인 국면에서 취한 행동은 의도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래플랜트의 영웅적인 모습은 무의식적인 충동의 산물이다. 그는 영웅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

 

버버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래플랜트와 정반대 지점에 있다. 버버는 거짓말로 영웅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의도치 않게(혹은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며) 악행을 저지른다. 그렇지만 버버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 영웅이 된 뒤 보이는 행보는 진짜 영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버버의 영웅적인 모습은 거짓말 위에서 위태롭게 서있다. 그런데 그는 영웅의 자리에 남아 있다.

 

래플랜트와 버버의 상반된 위치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을 영웅으로 남아있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 확고한 의지인가, 아니면 의지를 아슬아슬 떠받치고 있는 무의식(비의지)인가? 어째서 충동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래플랜트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버버가 영웅이 되었나? 비의도적인 영웅, 그러니까 래플랜트가 영웅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현상)인 걸까?

 

by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