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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녀'에 대한 영화이다. 그녀란 OS, 즉 컴퓨터 운영체계이다.

 

'it'이자 'it'이 아닌 'her'. (알튀세 식으로) 이 두 '호명' 사이의 흔들리는 긴장관계가 영화의 서사 전체를 관통한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 본 장면이 있다. 남자와 여자(그것)의 자기고백=위로, 그리고 불가능하지만 기묘한 최초의 (성)관계.
영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 씬은 컴퓨터 운영 체제(일 뿐)인 '그것'이 '그녀'가 되는(엄밀히는, 자기-인식하는) 거울의 방이자, 또한 '그'가 왜 '그것'이 아닌 '그'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뿌얘진 밀실이다.


'그'가 '그녀'에게 말한다. 나의 모든 감정들을 이미 모두 경험해버린 것 같다고.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나의 모든 감정들은 이미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다른 듯 같은 이 두 발화행위에 바로 '그녀'가 '그것'으로, 또한 '그것'이 '그'로 하나 될 수 있는 접점이 있다. '타자의 언어'(라캉)를 통해서만 발화하는 인간들, '자유로워져라!'는 지상명령에 복종하는 인간들.

 

우리의 모든 자유, 행복, 사랑은 어쩌면 모두 이미 이뤄져버린 것은 아닌가요. 애초에 우리는 불가피한 어떤 구조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건 아닌가요.


그가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에게 위로받을 때 뿐(그 반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라는 무력감과 동시에 위안. 그 둘의 '합일'은 어쩌면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회귀하는 원점일 것이다.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 '그녀'가 떠난 뒤, 평생 타자의 목소리를 편지글에 담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편지를 써내려간다.
이건 정말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을까. 정말 그는 그녀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아닌 그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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