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1972)

키워드: (반)과학, 예술, 사랑, 기억, 여성, 아버지

1. 과학? 예술!

 

<솔라리스>는 외계 솔라리스 바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므로 외형상 SF 혹은 과학 영화의 컨셉을 취한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 2014) 혹은 <콘택트>(로버트 저메키스, 1997)의 원형을 <솔라리스>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두 영화와 <솔라리스>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SF, 그러니까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세계관에 의존하는 반면 후자는 그와 전혀 무관하고 차라리 반대. 예를 들어 <인터스텔라>에 대한 과학적 타당성 논쟁, 비난은 가능하지만 <솔라리스>에 대해서 그런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솔라리스>는 판타지이며, 그것도 철저히 과학적 맹신을 부정하는 반과학적 판타지다.

 

<솔라리스>는 한 마디로, 오로지 사실로서 과학만을 인정하던 크리스 켈빈(도나타스 바니오니스)이 환영이라며 무시하던 현상을 직접 경험했을 때(솔라리스 정거장에서 자살한 아내가 ‘물질’로 살아 돌아왔을 때)에도 ‘과학’타령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과학을 거부한 <솔라리스>가 궁극적으로 다다르는 곳은 인류의 원초적 감정으로서 사랑. 말하자면 <솔라리스>는 이성을 거부하고 감정을 내세운다. 그러므로 마땅히 타르코프스키는 <솔라리스>를 통해서 과학이 아니라 예술을 얘기하고자 했다고 봐야 한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다음과 같이 나누기도 했다.

 

예술이란 실증주의적이고 실용적인 실천이 우리들에게 감추고 있는 저 완전한 정신적 진리와 함께 맺어져 있는 이 세계의 한 상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학자의 직관이란 마치 계시나 영감처럼 나타나더라도 결국은 논리적 발전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중략) 예술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인간의 정신적은 구조를 형성한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47~51쪽)


2. 사랑? 고통?

 

솔라리스의 정거장에서 죽은 아내 하리(나탈리아 본다르추크)를 마주한 켈빈은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헨리 버튼(블라디슬라프 드보르체츠크)나 사르투리우스 박사(아나톨리 솔로니친)이 마주한 대상은 사실상 고통의 기억에 머물렀던 존재.

 

이는 <솔라리스>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 사랑의 대상을 고통의 대상과 뒤섞음으로써 사랑이라는 감정의 모호함을 강조한다. 또한 하리가 죽기 전 켈빈과 하리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하리의 독살의 책임에서 켈빈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사랑의 맥락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3. 여성들

 

구체적인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슬라보예 지젝이 <솔라리스>에 대해 언급했던 적이 있다. ‘여성성, 아버지에 대한 사죄’ 뭐 그런 말이 기억나는데, 어쨌든. 확실히 소녀를 제외하고 유일한 두 여성인 하리와 켈빈의 어머니에 대해선 생각할 거리가 많다.

 

일단 어머니부터. 어머니는 마치 사물처럼 존재한다. 타자화라고 말하기에도 뭐한데, 그녀는 ‘하필’ 켈빈, 아버지(니콜라이 그링코), 버튼의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긴 하는데, 남자들은 그를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대화가 ‘방해받았다’는 이유로 성질을 낸다.

 

하리도 남성들의 주변부에 머무르긴 하지만 어머니와는 조금 다른 느낌. 주체성 자체를 찾기 힘든 어머니와 달리 하리는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물론 그녀의 주체성은 전적으로 남성에 대한 의존으로 나타난다. 달리 말해 하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남성들에게 내맡긴다.  

 

이는 여성성에 대한 선입견, 차별일 수도 있고, 여성성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일 수도 있따. 자크 라캉, 혹은 주디스 버틀러의 문장이 용이하다. “남성은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만(having), 여성은 곧 팔루스다(being).”

 

4. 카메라무빙/필터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유달리 카메라 무빙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쇼트 길이가 꽤 길게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감한 결정이었지 싶다. 줌인, 줌아웃은 수시로 보이고, 특히 패닝이 많다. 솔라리스 정거장 시퀀스에서 한 공간 안에 카메라가 중심에 위치하고, 주변부를 빙빙 돌면서 대화하는 인물 구도가 빈번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컬러이지만, 중간에 흑백뿐만 아니라 여러 색의 필터를 통해 색감을 조절한 부분도 눈에 띄었다. 이런 장치들은 충격, 당황, 근심, 수심 등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주효했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