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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소크>, 우연과 기억이 만날 때

*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ISFF에서 봤던 단편영화 제이미 도나휴, <소크>에 대한 리뷰입니다. AISFF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나는 막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막장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우연’의 수위일 텐데, 일단 우연과 필연의 이분법적 구별에 회의적이기도 하며, 만약 우연이 지나칠지라도 극적인 측면에선 오히려 긴장감을 유지·증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소크>에도 우연적 요소가 있다. 이는 서늘한 음악, 창백한 화면, 짧게 이어지는 쇼트들과 더불어 영화의 긴장을 극대화한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오키(Oki)가 하필 그때 거기서 빼앗긴 자전거를 마주하는 순간 이후 영화는, 그리고 그걸 보는 관객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다. 하지만 <소크>의 우연에는 극적인 효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편함이 있다.

 

<소크>는 기본적으로 주인공 패트릿(Petrit)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그러니까 영화는 현재가 과거를 둘러싸는 구조를 취한다. 이른바 현재-과거-현재의 액자식 구성. 여기서 과거는 철저히 개인적이다. 달리 말해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현재 패트릿에게 귀속되어있다.

 

이런 구조에서라면 과거가 다다르는 마지막 순간(즉, 오키의 죽음과 패트릿의 두 번째 배신)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은 전적으로 패트릿 개인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로써 영화의 배경인 코소보 사태가 주변부로 밀려나버린다는 문제 제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현실에 대한 천착이 결코 영화의 의무는 아니니까. 진정한 문제는 감독 제이미 도나휴가 기억과 우연을 경유하여 패트릿을 감당할 수 없는 사건 한가운데로 등 떠민 뒤, 멀찍이서 그의 처연한 표정을 즐기고(하지만 이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있다는 데 있다.

 

그런 맥락에서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자전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는 패트릿의 강박은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강박이 원래 그렇듯 신적 존재로서 감독의 지상명령이다. 그는 홀린 듯 자전거를 타고 감독이 편집을 통해 반듯하게 닦아놓은 길을 지나 과거로 들어갔다 나온다. 다시 돌아온 현재에서 잊을 수 없는 그 장소 위, 패트릿은 자전거 앞에 ‘놓여’있다. 거기서 그는 아무 표정 없이 망연하다. 마치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버려진 인형탈처럼.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