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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둔 채 뉴스 보기,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책을 펼치기 전에는 저자의 초점이 뉴스에 맞춰져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에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미디어 전문가가 아닌 철학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뉴스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급변하는 뉴스 속에서 개인이 어떤 중요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노력을 할애한다.

 

물론 그는 뉴스의 중요성에 대해 서론에서 충분히 인정한다. 그에 따르면 뉴스는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이다. 다만 뉴스를 수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뉴스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알랭 드 보통이 경계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보다 자의식을 갖고 뉴스를 수용하려 할 때 얻게 되는 보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뉴스는 예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저자는 뉴스를 크게 정치 뉴스, 해외 뉴스, 경제 뉴스, 셀러브리티 뉴스, 재난 뉴스, 소비자 정보 뉴스로 분류한다. 그가 뉴스를 분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실제 뉴스를 인용하면서 해당 뉴스가 갖는 한계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용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설명한다. 경제 뉴스에 나오는 숫자와 그래프가 우리네 삶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저자는 생생한 방식으로 주지시킨다.

 

그가 선택한 또 다른 방식은 뉴스와 예술 사이의 비교다. 그는 시, 소설, 희곡, 그림, 사진 등의 예술을 통해 뉴스에 결여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장 와 닿은 부분은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뉴스와 <보바리 부인>이나 <햄릿>과 같은 실제 비극 사이의 비교였다. 그는 아동 포르노 사진을 다운받아 징역형을 선고받은 미국 의사의 사례를 제시한다. 아울러 그가 햄릿처럼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햄릿보다도 더 추악한 인간으로 기억되는 것에 주목한다. 본래 “비극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품위 있고 호감 가는 인물도 결국엔 쉽사리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현대의 뉴스는 그런 교훈을 제공하지 못하며 단순히 그런 이상한 인물과 평범한 개인을 분리시키는 역할만 담당한다는 것이다. 즉, 뉴스는 공포를 비극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 부분은 한국의 언론도 충분히 새겨들어야할 대목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역시 오원춘 살인사건이나 잇따른 성폭행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언론이 범인의 기행에 주목하거나 자극적인 범행 묘사에만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뉴스 수용자는 공포감을 갖고 범죄에 대해 전보다 더 경계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런 흉악범이 사실은 평범한 개인과 머리카락 한 올 차이밖에 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은 흉악범이 어떻게 범죄자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은 뉴스 수용자로 하여금 똑같은 과오를 똑같이 저지르지 않게끔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포가 비극이 될 때 뉴스 수용자도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뉴스에서 벗어나라?

 

알랭 드 보통은 뉴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현재 뉴스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줄곧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런 태도는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뉴스란 기본적으로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한 묶음의 이야기에 불과” “뉴스는 아무 의심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소비자들에게 주기적으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뉴스는 모든 게 쇠퇴하기 마련이라는 절대적인 불가피성을 정직하게 직시하기보다는… 새로 발견된 건강 정보를 팔아먹는 걸 더 좋아한다” 등과 같이 그는 뉴스에 비판적인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리고 이는 책의 마지막 장인 결론에서 더 구체화된다. 그는 기술의 발전 덕에 개발된 구글 뉴스와 같은 맞춤형 뉴스 기능을 소개한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대중의 수만큼 다양한 뉴스 채널”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한계를 지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뉴스를 접하길 바라는지 잘 알 만큼 정말 스스로 의식적인 준비를 갖추었는지”를 의미한다. 결국 맞춤 뉴스는 사람들의 뉴스에 대한 가치 판단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현재의 뉴스 편집 시스템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뉴스의 본질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새로운 것이 늘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동시에 뉴스를 소비할 때 우리는 내면 탐구에서 멀어진다는 역설을 언급한다. 어쩌면 알랭 드 보통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결국 <뉴스의 시대>는 범람하는 뉴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를 논하는 책이다. 기자가 되기를 꿈꾸는 나로서는 (뉴스 자체의 모순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조금은 불편한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지점들을 뉴스가 극복한다면 역으로 뉴스는 그가 지향한 예술의 한 영역이 될 수 있다. 내면을 탐구하도록 돕는 뉴스, 어쩌면 그것이 앞으로의 저널리즘이 추구해야 할 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외에도 흥미로운 부분은 많았다. 객관적인 보도보다 편향된 뉴스가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그의 분석은 기계적인 균형보도가 사실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생산하지 못할 수 있다는 한계를 유추하게끔 했다. 비단 뉴스 영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알랭 드 보통은 인간의 행위와 연결된 감정을 잘 읽어내는 듯했다. 사람들이 제품을 소비하는 이유는 그 제품의 특성을 닮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부분도 그랬고, 문화 저널리즘을 설명하면서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한 부분은 그의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그러고 보니 별밤은 주로 영화, 드라마, 예능과 같은 대중문화를 논하는데 작품의 화제성보다는 ‘작품의 어떤 부분이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가’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by 락

 

*사진 출처: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