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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단지 ‘한국이 싫어서’였을까

category 2015. 11. 7. 21:13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소설이다. 주인공 계나는 평범한 한국여성이다. 대학 졸업 후 카드회사에서 멀쩡하게 직장 다니던 그가 돌연 호주로 이민 갈 생각을 한 이유는 ‘한국이 싫어서’다.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고.

그 이유는 마치 압축파일과도 같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마리를 풀어볼 수록 그만한 사정과 계기들이 중첩돼 있다. 계나가 한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지옥과도 같은 출퇴근길이 싫어서고, 남자친구 지명과의 신분 격차가 싫어서고, 도리어 자신에게 짐이 되는 가족들이 싫어서고, 회식 때마다 서슴없이 음담패설을 일삼는 상사가 싫어서다. 이밖에도 수많은 ‘싫어서’들이 모여 계나의 이민 결심을 확고히 만든다.  

 

계나의 논리는 간단명료하다. 한국에서 살면 희망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은 한국사회에서 경쟁력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의 결심은 워낙 완고해서 가족이나 남자친구 지명이 막을 수 없다. 그렇게 그는 훌쩍 떠나버린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하지만 호주에서의 삶도 그리 평탄치만은 않다. 살찌는 것에 대해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쿨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다는 건 분명 호주 이민의 장점이지만 단점의 그림자를 모두 가릴 정도는 아니다. 계나는 줄곧 (외국과 한국) 남자들에게 치이고,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면 불운한 사고로 위험을 마주하기 일쑤다. 그에게 호주는 미지의 영역이라 이래저래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계나는 호주에서 철저히 경계인이자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명의 제안에 혹해 잠시 한국에 돌아가지만 다시 호주로 돌아가 영주권을 취득한다. 왜일까? 호주도 싫은 점은 있고, 한국도 싫은 점은 있는데 구태여 호주를 선택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절반은 국가에게 절반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인식틀에 있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중략)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호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는 젊고 자유로우니까요.”라고 시작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참 사이다 같은 지적이다. 딱히 반박하기가 어려울 만큼 계나는 애국과 국격만을 강조하는 한국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가 호주에서 차별을 감내하면서까지 살려는 이유는 적어도 호주는 국가만을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잘난 국민과 못난 국민을 나눠서 차별하지 않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유만으로 계나가 가족과 사랑하는 이가 있는 한국을 떠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들 이렇게 살아. 다른 회사도 그래. 요즘 저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학교 선생 말고 누가 있냐? 너도 취직하면 알 거야.”
“호주에선 안 그래”
(중략)
“호주에서도 그럴걸. 너도 호주에서 제대로 된 사무직 일은 해 본 적 없잖아. 호주에서도 기업 임원이나, 펀드매니저나, 변호사, 의사 같은 사람은 정신없이 바쁠걸?”

 

계나와 지명의 대화다. 이 대화에서 계나가 호주를 선택한 이유를 엿 볼 수 있다. 계나는 ‘진짜 직업’과 ‘가짜 직업’을 분류하는 지명의 인식틀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다. 계나는 분명 지명을 사랑하고 그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지만 지명 옆에선 그저 평범한 주부로 살게 될까 두려워 한국을 떠난다.

 

다시 말해 계나가 한국이 싫은 건 단지 한국이라는 나라만 싫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와 잘못된 인식을 알면서도 그저 수긍하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싫어서다. 재미난 점은 계나의 지적이 책 밖으로 나와서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자조적으로 헬조선을 외치고 금수저니 흙수저니 따지는 것이 청년들의 유희문화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판은 딱 거기서 멈춘다. 송곳처럼 시스템에 균열을 가하고 종국에는 뚫어버리는 인물은 찾기가 어렵다. 공허한 비판이 인터넷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사이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부조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강화된다. 마치 태풍의 전조 현상을 감지하곤 창문에 신문지를 덧대듯이 말이다.

 

<표백> 때와 마찬가지로 장강명 작가가 바라는 것은 청춘의 절망과 포기는 아닐 것이다. 합리적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계나 역시 비판의 여지는 많다. 호주에서 만난 재인이 스스로 ‘지잡대’를 나왔다고 하니 자신은 홍대 나왔다는 걸 강조하는 부분이나 동생 예나의 남자친구가 직업이 없다고 하자 제멋대로 ‘듣기만 해도 뭔지 알겠지’라고 규정짓는 모습은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장강명은 항상 반대로 이야기해 왔다. <표백>에서는 자살이 주요 소재였고,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탈조선이 주요 소재지만 그가 원하는 건 청년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한 새로운 시도일지도 모른다. 불평불만을 넘어선 대안 창출, 헬조선도 탈조선도 아닌 제3의 길을 찾아보라는 작가의 조언이 자꾸만 귓전을 때린다.

 

by 락

 

*사진 출처: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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