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영화 <암살>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의 모티브가 된 이는 실존인물이다. 바로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 남자현 지사다. 그는 1926년 사이토 총독 암살시도를 기점으로 무장투쟁에 나섰으며, 1933년 일제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려다 일본 형사에 체포돼 단식투쟁을 벌이다 순국했다.

남자현 지사는 김구, 김원봉, 안중근,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분명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을 썼던 독립운동가다. 업적의 경중을 떠나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광복이라는 다소 불투명한 가능성을 품고 몸을 바친 이들의 용기는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그리고 여기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또 다른 독립운동가가 있다.

 

“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중략)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이는 김학철이 해방 직후 “해방의 은인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고 외치는 당대 조선공산당 최고 실세였던 박헌영 앞에서 한 말이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희망을 품었지만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1인 독재 체제에 대해 항상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과 북에서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남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김일성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김학철은 18세의 나이에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순응하지 않았던 그의 패기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는 무작정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향한다. 어린 나이 탓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첫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 홀로 서는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김학철은 가족들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주체로 성장한다.

 

중국으로 들어간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상해임시정부를 찾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의열단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그는 독립군의 삶을 살아간다. 중국 호북 강릉에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고 22세의 나이에 조선의용대 창립대원이 된다.

 

1941년 김학철은 호가장 전투에 분대장으로 참전한다. 그는 일본군과 교전 중에 다리를 부상당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이듬해 1월부터 4월까지 일본군의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아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한다. 결국 일본 본토로 건너간 그는 수감생활을 했고, 1945년 29세의 나이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비극적이게도 그때가 바로 광복 직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학철은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 이야기>를 읽고 계급사회에 대해 깨우침을 얻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학철이 모든 일본인을 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들을 열린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나가사키 형무소 복역 중에도 일본인 친구들을 꽤 사귀었는데 이는 그가 조선-일본의 이분법적 대립에 빠지지 않고 개방적인 자세로 일본인들을 대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적은 모든 일본인이 아닌 일제의 제국주의자들임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서도 비판의식을 꺾지 않는다.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모택동과 같이 신격화된 공산주의, 그릇된 공산주의는 그의 주요 비판 대상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일당 독재 체제에 일침을 가했다가 쫓겨났고, 연변에서는 1961년 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0년 징역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김학철은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그는 당을 1인 독재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에서 공산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가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연주단이 문제이지 베토벤의 위대함마저 깎아내려서 되겠느냐는 그의 비유는 그럴듯하다. 

 

오늘날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박하다.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만 해도 공산주의 관련 책들은 죄다 불온서적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는 분위기이다. ‘종북’의 옛말은 ‘빨갱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념의 토론에 있어서 자유가 없다.

 

부끄럽게도 나는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나의 게으름 탓도 있지만 내가 받은 교육과정 내에서 관련 개념을 공부해야 할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성의 적극적인 회복을 추구한다는 어렴풋한 내용만을 알 뿐이다. 그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선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를 예로 들며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다.

 

그런데 김학철에 의하면 소련이 붕괴한 것은 공산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공산주의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소련이 붕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고도 자본주의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좌절은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 역시 본래의 이념에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과연 누가 지휘하고 연주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항상 일본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숨겨지고 가려진 이면의 역사에 대해선 알면서도 침묵한다. 단지 그가 우리가 추구하는 이념과 다른 이념을 따랐다는 이유로, 또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식의 접근 방식으로는 70주년 광복의 축복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한반도는 지난 60년 간 이념의 문제로 너무 많은 이들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북한이든 연변이든 그것 역시 우리의 역사이다. 헌법에서는 우리나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명예직인 이북 5도 도지사까지 있는 마당에 어째서 문학, 역사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김학철을 찾아내야만 한다.

 

김학철이 남긴 말 중 가슴에 울림을 준 말을 적으며 70주년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참고 자료: <김학철 평전>

*사진 출처: SB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도플파란 2015.08.15 04:46 신고

    김학철 평전 서점에서 봤었는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