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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마미>, 놓쳐선 안 될 세 가지 물음들

 <마미>는 내가 본 자비에 돌란의 첫 번째 영화이지만, 자비에 돌란에게 있어서는 다섯 번째 영화였다. '칸의 총애', '25살의 천재', '게이', '칸 영화제 최연소 심사위원상'의 감독. 그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들을 뒤로 한 채 영화를 보러 갔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나 본 후에나 영화 밖의 어떤 문맥도(예컨대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라든지, 감독의 말이라든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라든지) 외면하려는 편이다.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보고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감독의 자장 내에 있는 다른 영화들의 문맥 속에 영화를 위치시켜보는 것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런 정보도 없이 선뜻 '문제적'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사전에 영화나 감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감독의 앞선 네 편의 영화(2009년에서부터 2013년까지)들을 미리 보기라도 해야 했으나, 게으름은 병이었다. 역시나. 무턱대고 마주한 자비에 돌란의 강렬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감독의 세계로 찾아가 노크를 했으나 군대와는 달리 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화면, 음악, 캐릭터, 서사, 설정 등 뭐 하나 나를 편안하게 하는 거라곤 없었다. 마치 영화가 "어서 와. 자비에 돌란은 처음이지?"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처음으로 놀이공원에 간 아이처럼 벙쪄있었다. 나를 둘러 싼 주위의 모든 것은 인공적이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새롭지만 막연했으며 가벼운 신음이 감탄과 두려움 중간 어느 즈음에서 새어 나왔다. 이 글은 나처럼 <마미>를 '무턱대고' 보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나는 영화상영이 끝난 후 홀로 남은 적막의 잉여를 참지 못하고 영화를 다시 봐야 했지만, 그러지 않을 사람들에게 예방접종을 해주려고 한다. 이 열병 같은 영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극장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면 입장 시작 전에, 또한 영화가 끝난 뒤 두 시간이 넘은 시간을 함께 했던 이와 함께 아래 세 가지 질문을 되뇌어보길 바란다. 

 

1. 화면의 효과는 어떠한가?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이다. 레터박스(검은 여백)가 눈에 걸리긴 하지만, 1:1 정사각형 모양의 화면은 낯설고 신비롭다. 이러한 화면에서 감독은 무엇을 노렸을까? 첫 번째 질문이다. 1:1 비율에선 인물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좌우의 공간이 가려지기 때문에, 인물을 클로즈업할 때는 온전히 인물만이 화면에 들어찬다. 정사각형의 화면이나 음울하면서도 선명한 밝기 때문인지 내겐 매 쇼트들이 마치 각 인물들의 초상화를 보는 것처럼 다가왔다. 특히 바스트 샷에서 잠잠히 끓어오르는 정제된 아름다움이란! 하지만 계속해서 1:1비율의 화면이 유지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화면이 늘어나 와이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씬들이 몇 군데 등장한다.

  그런데, 흔히 말하듯 넓어진 화면에서 어떤 해방감의 분출이 느껴지는가? 솔직히 나는 해방감이라기보단 어떤 불안의 과잉을 느꼈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오히려 정사각형의 화면에서 음울하지만 차분한 정갈함을 느꼈다. 좌우가 잘린, 인물만이 온전한 화면에서 우울과 불안과 고통은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에, 몸짓과 제스처에 억압되어있다. 그러나 화면이 커지고, 덩달아 커지는 음악 소리에서 그네들의 감정선은 폭발한다. 뭐가 좋고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과잉된 우울, 불안의 표출이 영화 속 인물들에겐 아마 해방감이겠지만, 과연 그걸 표현해낸 방식을 접하는 관객들도 그러한가? 정말로 관객은 다시 1:1의 비율로 좁아진 화면 앞에서 답답함만을 느끼는가?

 

 

2. 소리는 왜 그렇게 끈질기고 혼선을 빚는가? 

  영화의 BGM 또한 새롭다. 다양한 음악들이 영화 진행 도중에 끊임없이 깔린다. 하지만 <마미>의 음악들을 BGM이라 칭하는 것이 음악의 위치에 대한 온당한 언급이 될 수 있을까? 질문을 달리 하여, <마미>에서 음악들은 단순히 '백그라운드' 뮤직에 불과한가? 음악들은 영화의 진행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삽입되었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처음에 잔잔히 깔리던 음악은 어느 순간 의식의 한 가운데로 파고든다. 높은 볼륨을 통해서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지속적인 음악의 연쇄를 통해서든. '백그라운드'에서 흐르던 음악이 순식간에 '포그라운드(foreground)'로 침범해오는 순간이란 무엇일까?

  소리의 혼선도 계속해서 반복된다. 스티브(앙투안-올리비에 필롱 분)가 라디오 두 개를 동시에 트는 것뿐만 아니라, 커질 대로 커져 전면화 되어버린 음악과 인물들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또한, 인물들의 대사와 맞먹는 크기의 주변 소음들은 메시지에 집중하려는 관객을 방해한다. 왜 소리는 명확하지 않고, 종종 혼선을 빚는가? 사실 이는 다만 소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의 제요소들이 전반적으로 뒤섞인다. 영상과 음악, 대사와 영상, 음악과 대사 등등. 굳이 관객의 몰입을 흐트러뜨리는 이러한 뒤섞임은 무엇인가?

 

3. 아니, '마미'는 두 명이었지?

  영화를 처음 볼 때 한동안 나는 <마미>에서 마미, 즉 엄마가 두 명이라는 것을 깜빡 했다. 하나의 엄마는 분명 스티브의 엄마 디안(안느 도발 분)이지만, 카일라(쉬잔느 클레몽 분)도 한 아이의 엄마라는 점을 잊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말미 전까지 카일라의 이미지는 섹슈얼하다. 카일라가 처음 등장하는 어리둥절한 씬에서 카일라의 위치는 한 가정의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아내이자, 엄마로서 부각된다. 하지만 스티브와의 만남 이후, 영화는 카일라와 스티브 둘 사이의 미묘한 성적 긴장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음악과 카메라의 구도, 시선, 응시, 끈적끈적한 말꼬리들. 그런 식으로, 은밀하게. 나의 상상이 과도한 게 아니었다면, 영화 중간중간에 둘의 섹스를 추측하게 하는 여백이 숨 막힐 듯 남겨지곤 한다. 이런 예상은 늘, 보란 듯이 깨지지만.

  결국 카일라가 스티브의 섹슈얼한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어떤 의미에서는 스티브의) 엄마였다는 점은 영화 말미에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스티브가 떠나고 남은 집에서 디안과 카일라의 대화. 스티브와 관련한 약간의 언쟁, 그리고 작별인사, 헤어짐. 디안을 남기고 자기의 '가정'으로 향하는 카일라. 카일라의 오묘한 미소. 이 씬에서 나는 카일라가 (스티브의 또 다른) 엄마로서 스티브에 대한 '권리'를 피력하는 방식을 보았다. 어떻게 보면 이 지점에서 디안과 카일라는 솔로몬 왕을 찾아가 이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두 명의 여인과 닮아 있다. 영화에서 '마미'로서 카일라의 위치는 어떠하며, 영화가 초중반에 카일라의 모성적 이미지 위에 섹슈얼한 이미지를 덧칠한 까닭은 무엇일까? 달리 말해 모성적 주체와 섹슈얼한 대상,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카일라는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창녀이자 성녀. 마리아와 마리아. 카일라와 카일라.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인물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진출처: 다음영화, 스포츠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