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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안젤리나 졸리의 첫 연출작 <언브로큰>을 설레는 마음으로 보러 갔다. ‘감독’ 안젤리나 졸리 혹은 영화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안젤리나 졸리라는 이름 혹은 사람에 대한 기대랄까. 사실 그녀의 연기를 좋아하는 편도, 그녀의 외모에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는 편도 아니다. 왜, 그냥 누군가 이름만으로도 아우라가 풍겨 나오는 사람. 뒤에선 욕하다가도 막상 마주치면 입도 뻥끗 못 할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내게 안젤리나 졸 리가 그런 존재라는 걸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깨달았다.

하지만 <언브로큰>을 보는 내내 (안젤리나 졸리가 이 글을 볼 리 없으므로 하는 말이지만) 고통스러웠다. 아래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지겨웠고(지루하진 않았다), 뻔했고, 민망했고, 오글거렸다. 일전에 <국제시장>(윤제균, 2014)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썼던 글이 있는데(‘<국제시장>,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다섯 가지 팁’), <언브로큰>을 보고 <국제시장>이 떠올랐다. 이번 글에서는 <언브로큰>을 <국제시장>과 연관 지어서 어떤 점이 다르게 ‘못났’고, 어떤 점이 비슷하게 ‘못났’는 지를 살펴보겠다.

 

 

1. 한 개인이 겪은 고난의 일대기?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 분)라는 개인의 일대기다. 대한민국의 굵직굵직한 역사를 덕수라는 개인의 시선을 통해 담아냈다. 하지만 <국제시장>에 대한 글에서 나는 덕수라는 개인이 과연 개인일 뿐인가, 하는 의문을 던졌다. 자세한 얘기는 반복하지 않겠지만 덕수가 아버지들의 표상인 이상, 덕수는 단순히 개인이라고 할 순 없다.


<언브로큰>에서도 루이스 잠페리니(잭 오코넬 분)의 개인사를 다룬다. 영화는 2차 대전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루이가 겪는 역경에 집중한다.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대양에서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기며 표류하고, 일본에서 포로로 잡혀서 온갖 고초를 다 겪는다. 그 와중에도 루이는 끝까지 일본군 장교에게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루이라는 개인은 ‘언브로큰(unbroken)’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결코 ‘깨지지 않고’ 버티며 역경들을 헤쳐나간다. 이런 루이에게는 경외감마저 든다. 하지만 이런 경외감이 단지 루이라는 개인에게 향한다고 할 수 있을까. 

 

 

(1) 루이 – 선전포고

 

영화의 서사 밑바탕에는 ‘미국 대 일본’의 대립 구도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루이는 미국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개인으로 등장한다. 영화 초반에 두 번의 과거 회상 씬이 플래시백으로 나온다. 플래시백 이전에는 루이를 포함하여 전투기에 탄 무리가 미군이라거나, 상대편이 일본이라는 명확한 단서는 제시되지 않은 상태였다. 플래시백 이후 과거에서는 루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성장기가 이어진다. 루이는 이탈리아계 이주민의 자식이다. 루이의 국적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아이들에게 놀림 받는 씬에서 뿐이다. 첫 플래시백 어디에서도 루이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나의 부주의함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애초에 영화는 이런 식으로 ‘개인’으로서, 혹은 ‘이탈리아계’라는 것을 부각해 미국인이라는 점을 지운 뒤 루이를 전면화한다. 일종의 영화의 선전포고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전포고에 있다. 차라리 대놓고 미국을 선전하고 일본을 비난했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전포고 이후 영화는 교묘하게 미국과 일본을 관객들의 시선에서 가리게 된다. 영화가 관객들을 기만하는 셈이다. 

 

(2) 와타나베(미야비 분) - 일대일의 대립 구도

 

그런데 미국과 달리 일본이라는 국가는 처음부터 전면에 등장한다. 일본군은 대양에서 표류하던 루이들이 일본 군함을 맞닥뜨리는 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루이들의 시선에서 (아래서 위로) 일본군을 잡은 쇼트에서는 욱일승천기가 화면의 중앙에서 두드러진다. 다음 쇼트에서 루이들은 욱일승천기가 전면에 꽂힌 일본 군함의 그림자 속에 파묻힌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루이라는 개인을 등장시켰던 미국 쪽과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즉, 일본이라는 국가는 괄호 쳐지지 않는다. 이후 등장하여 루이와 대립각을 세우는 일본 장교 와타나베도 일개 개인이기 이전에 일본 군인이다.

 

 
하지만 와타나베 등장 씬 이후로 영화는 이전과 달리 일본을 지우고 와타나베라는 개인을 부각한다. 이를테면 루이와 와타나베의 일대일 대립 구도가 그렇다. 영화 중반부 이후 끊임없이 와타나베는 루이를 못살게 군다. 와타나베는 ‘악’ 그 자체다. 하지만 악이라는 이미지에서 와타나베는 일본 군인으로서 존재하는가. 사실상 일본군을 악하게 묘사한 것은 와타나베에 대한 묘사와 겹친다. 그러니까 와타나베는 애초에 일본군으로서 등장했지만, ‘악’이라는 이미지는 와타나베 개인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루이가 사실상 적대적 감정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와타나베 이후고, 적대의 대상은 와타나베 개인에게 쏠린다. 와타나베도 미국을 종종 언급하긴 하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루이를 집중적으로 괴롭힌다. 후에 그건 일종의 열등감이었음이 드러난다. 즉, 와타나베가 루이를 괴롭힌 것은 미군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미군) 루이와 (일본군) 와타나베의 대립을 전면화한다.  

 


이는 <국제시장>에서 설명했듯이 (비)정치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연관된다.  루이가 개인으로 부각되면서 가려지는 것은 무엇인가. (미군) 루이의 역경은 미군 루이의 역경과 달리 어떻게 관객의 심리 속으로 파고드는가. 우리의 분노가 (일본군) 와타나베 개인에게 집중적으로 쏠리는 것은 어떤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가?
 
2. 길고 자립적인 시퀀스들

 

<국제시장>에 대해 나는 파편적 구조의 연쇄적 나열에 그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언브로큰>도 유사하지만, 파편이라기엔 시퀀스가 상당히 길다. 내가 봤을 때, 영화에서 시퀀스는 크게 네 개로 나뉜다. 바다에 표류하기 전, 바다 표류기, 첫 번째 (기억력이 나빠서... 오타인가 와타인가 뭐시기) 수용소, 두 번째 석탄 (여기는 아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용소. 각 시퀀스는 상당히 길다. 또한, 각 시퀀스들은 자립적이다. 여기서 자립적이라는 것은 모든 시퀀스들을 각자 하나의 완결된 구조로 봐도 무방하다는 의미이다.

 


시퀀스들 하나하나 나름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으며, 서스펜스적 분위기를 잘 살린 편이다. 물론, 시퀀스들을 나눠서 볼 때야 그렇다. 하지만 나는 매번 시퀀스가 넘어갈 때마다 큰 벽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국제시장>에서 재난적 포맷들의 무자비한 연쇄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한없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국제시장>의 조울증적 분위기에 비해 <언브로큰>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래서 <국제시장>에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면, <언브로큰>에서는 고통을 느꼈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밋밋한 공원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바로 같은 공원을 호랑이 열차로 타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막막함이랄까.


처음에 <언브로큰>이 지루하진 않았지만 지겨웠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지루한 것과 달리 지겨운 건 반복되는 것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나는 지루한 건 잘 참는 편이다. 정 지루하면 자면 된다. 하지만 지겨운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립적이고 긴 시퀀스들을 버티면서 나는 문득 이 영화가 옴니버스형식으로 애초에 구성된 게 아닐까 자기암시를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좀 편해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러기엔 또 너무 시퀀스들이 긴밀했다. 결국, 문제는 애매하게 자립적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시퀀스들의 관계 탓인 것이다.

 

3. 생략 혹은 구구절절

 

<국제시장>에서 지극히 가볍고 지극히 무거운 분위기가 중간 없이 번갈아 제시되었다고 한 바 있다. <언브로큰>은 좀 다른 의미에서 중간이 없다. 바로 위 항목에서 긴 시퀀스에 말했는데, 시퀀스들은 길 뿐만 아니라 구구절절하다. 특히 루이들이 표류하는 시퀀스는 좀 심하다. 나는 표류 씬을 보는 내내 어딘가에 있을 안젤리나 졸리에게 왜? 도대체 왜? 계속 물었다. 물론 그녀는 루이가 밟은 고난의 행적을 철저하게 되짚고자 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자체가 그렇다. 고난 이후 고난 이후 고난... 뭐 그건 좋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루이에 대한 헌사로 바쳐졌으니까. 하지만 표류 시퀀스를 구구절절하게 연장한 것은 오히려 고난을 겪는 루이에 대한 (나같은) 관객들의 동조를 반감시켰다. 중간마다 (도대체 왜 집어넣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자질구레하게 웃긴 씬들이나, 상어, 풍랑, 피격 등 자잘한 사건들의 병렬적 배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어안이 벙벙하게 할 따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루이의 고난보다는, 씬이 바뀔 때마다 야위어가는 연기자들이 가여웠다.

 


반대로 생략된 장면들도 많았다. 그런데 오히려 구구절절 늘어놓은 부분보다 생략된 장면들 중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 많았다. 이를테면 나는 구명보트 위에서 루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대해선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토종 미국인들에게 조롱받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루이가 ‘미국대표’로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심적 갈등이 궁금했다. 또한 와타나베가 어린애마냥 울먹거리며 루이에게 ‘앙탈’을 부린 이후도 궁금했지만, 영화는 둘의 갈등을 전쟁 자체를 종결시킴으로써 해소했다. 뭐, 이런 식. 어쩌면 안젤리나 졸리는 시간에 쫓겨 과제를 하듯 이 영화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중요한 물음들, 궁금증들은 뒤로 한 채 일단 많이 남은 여백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사를 동원하고 동어반복을 활용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처음이니까. 부담이 컸을 것이고 자신감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던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4. ‘달리기’라는 수법

 

마지막으로 <국제시장>에서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클리셰로서의 장치에 대해 언급했었다. <언브로큰>에서는 강박적으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전략적으로 쓰인 장치로써 달리기를 들 수 있다. 달리기는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다. 그런데 달리기는 영화에서 핵심임이 분명하지만, 사실상 계속 영화를 겉돌고 있.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 개인의 고난을 기리는 데 달리기가 굳이 필요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물음을 우선 제기해 봐야 한다. 전쟁 통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남은 군인들의 이야기는 이제 좀 싫증 날 때가 되지 않았나. 달리 말해 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리나 졸리가 이 소재를 선택한 까닭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애국 정서를 자극한다면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최소한 애국심 투철한 관객들은 확보될 것이고, 애국 정서를 자극하는 데에는 전쟁이라는 소재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그렇다고 하더라도 뻔한 스토리 전개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수가 겪었고 영화화된 사건이지만, 특수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그때 루이의 달리기는 유용한 장치(서스펜스)였을 것이다. 달리기 미국 국가대표 출신이고, 일본 올림픽에 참여하려다 못했는데(영화에서도 구체적인 이유는 안 나온다) 마침 일본과의 전투에 참가하고, 후에 일본에서 성화봉송자로 참여해 달렸던 사실들이 자칫 뻔한 영화를 흥미롭고 색다르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글쎄, 졸리에게 미안하지만 달리기라는 소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영화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사진 출처: 다음영화, 다음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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