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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강남 1970>과 유하에 대한 3가지 키워드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게 유하는 영화감독 이전에 시인이었다.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사랑의 지옥> 중). 한때 유하는 내게 사랑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영화감독’ 유하는 유하라는 이름에 건 나의 기대를 와르르 무너뜨렸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나는 지금까지 유하의 이런 뚝심 혹은 비뚤린 행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비열한 거리> 이후로 유하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유하가 변했다! 혹은 유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

<강남 1970>(<강남>)의 개봉 소식을 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유하구나.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번까지는 그렇다 쳐도, 세 번이나? 앞의 두 영화도 그렇고 <강남>은 사실상 ‘조폭’ 영화다. 물론 배경이나 상황 설정은 다르지만, 분위기 등 영화의 기본적인 틀은 세 영화 모두 동일하다. 그러니까 유하는 같은 얘기를 다른 식으로 세 번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관객들이 지겨운 것 둘째 치더라도, 유하 본인도 조폭 영화라면 이제 지칠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폭 영화를 반복한다는 것은 무언가 말하고 싶거나,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유하가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보여주지 않으면서 보이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영화감독 유하를, 그의 이해할 수 없던 행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이번 글에는 감독 유하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강남>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았다.  

 

1. 뚝심 혹은 자부심의 근거 - 시적 상상력. 그러나?

 

앞서 말했듯 <강남>은 뻔하다. 영화 좀 본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조폭 영화 한두 편 정도는 봤을 것이다. <강남>은 그러한 조폭영화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소재부터 그렇다. 의리, 우정, 사랑, 배신, 패싸움, 주먹질 등등. 또한, 영화의 구성방식도 흔한 조폭 영화와 다르지 않다. 짧디짧은 쇼트들은 속도감과 긴장감을 더하며, 액션 씬에 돌입하게 되면 어김없이 ‘간지’나는 음악(참고로 <강남>의 영어 제목은 <Gangnam Blues>다.)이 깔린다. 적절할 때 걸어주는 슬로모션은 멋진 배우들의 액션을 돋보이게 한다. 여기까지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짐작한 대로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잘 나가는 영화의 흐름에 제동을 거는 지점이 몇 군데 있었다. 이를테면, 대사 치는 두 인물의 바스트 혹은 얼굴을 클로즈업 한 쇼트들이 번갈아 제시되는 와중에 불현 듯 한 인물이 입에 물고 있는 파이프 담배를 위에서 아래로 잡은 쇼트가 그렇다. 또한, 용기(김래원 분)가 길수(정진영 분)을 칼로 찌르기 직전에 둘의 투 샷을 담은 서늘한 쇼트. 매우 짧은 그 쇼트에서 카메라는 흐릿하고 흔들리며, 용기와 길수의 몸통만을 겨우 담아낸다. 다음 쇼트는 또 어떠한가. 기택(정호빈 분)과 용기가 마주한 영화관. 거기서 마침 기택의 죽음(징조)과 함께 터지는 영화(속 영화) 속 폭발음. 거기다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은 쇼트, 혹은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지워진 혹은 생략된 시간도 그렇다.

 

미쟝셴도 마찬가지다. <강남>에서 미쟝셴은 뛰어났지만, 흠잡을 데 없는 미쟝셴은 오히려 과잉으로 다가왔다. 특히 액션 씬에서 그랬다. 여러 번 반복되는 액션 씬들마다 감독이 의도했으리라 짐작되는 장치 혹은 재료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 전당대회장, 우천, 진흙, 갈색으로 물든 하얀색 와이셔츠, 우산, 다리미, 극장과 스크린, 파이프 담배, 화장실, 카바레, 일본도, 안경 등등. 이러한 것들이 내게 과잉으로 다가왔던 것은 추측건대 감독이 미쟝셴에 강박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지 싶다.

 

이런 식으로 영화에서 간헐적으로 삽입되는 기묘한 쇼트 혹은 미쟝셴을 통해 나는 유하가 진정 보이려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인’ 유하.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메타포, 상징, 이미지, 함축, 암시 등. 시의 제요소와 위에서 언급했던 <강남>의 미묘한 구성. 천생 시인인 유하는 영화 속에서도 시적 상상력을 녹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뻔한 이야기,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감독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뻔한 이야기 속에서 반짝이는 시적 감수성 혹은 이미지는 어떠한가. 까마귀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고고한 학의 삶을 살던 유하는 과감히 까마귀 무리로 달려들었다. (학을 높이고 까마귀를 낮추려는 것은 아니다. 학은 ‘고급예술’, 까마귀는 ‘대중예술’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물론 대응쌍은 바뀔 수 있다.) 이런 무모함은 유하의 용기 혹은 자신감의 증거 혹은 징후다. 더 나아가 조폭영화에 대한 유하의 집착도 설명 가능하다. 패고 죽이고 하는 게 사실상 전부인 조폭영화일지라도, 아니 오히려 조폭영화이니까 거기 숨겨진 시적인 아름다움은 그 어떤 감독도 감히 시도하지 못할 ‘시인’ 유하만의 것이리라. 미쟝셴을 통해 전해져오는 정갈하고 강렬한 이미지, 암시적인 쇼트, 그리고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생략된 시간에서의 함축미, 암시를 내포하거나 상징성을 잘 살린 씬. 그런 것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시인 유하와 영화감독 유하 사이에는 어떠한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가. 언어적 상상력은 무난히 시각적 영상으로 재구성될 수 있었는가? <강남>에서 영상화된 시적 상상력은 각 씬 혹은 쇼트만 두고 봤을 때는 나름 제대로 기능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남>은 시집이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이다. 시집과 소설집이 다르듯, 시집과 영화는 같을 수 없다. 같은 의미에서 시적인 상상력을 이곳저곳에 배치했다고 하더라도, 영화가 시집이 될 순 없다. 나에게 <강남>은 시집과 영화, 그 중간 지점에서 애매하게 걸쳐있었다. 말하자면 <강남>에는 분명 시차가 존재했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쇼트 혹은 미쟝셴을 기묘하다고 표현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리라. 시적 감수성과 영화의 충돌, 혹은 둘 사이의 간극. 무리한 바람일 수도 있으나, 유하의 차기작은 두 장르 사이를 유연하게 가로지르는 영화이길. 

 

2. 가족의 가벼움

 

최근 개봉한 <국제시장>(윤제균, 2015)이나 <허삼관>(하정우, 2015)은 모두 가족과 가족애를 다뤘다. 두 영화 모두 아버지라는 위치에 있는 존재의 희생이 중심이다. 하지만 <강남>에서 가족은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은 없거나, 사후적으로 구성되는가 하면, 쉽사리 해체된다. <강남>에서 가족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큰 문제 될 것 없는 허울이다.

 

길수가 종대를 (사실상)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그렇다. 둘의 관계를 진전시킬만한 별다른 사건(그나마 있다면 죽을 뻔한 종대를 길수가 구해준 것)이 제시되지 않은 채, 천애고아였던 종대는 ‘쉽사리’ 새로운 가족을 찾는다. 여기서 가족이란 그렇게 큰 정서적 교감이나 연대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선혜(설현 분)의 결혼도 마찬가지다. 선혜와 남자친구의 키스씬 이후 결혼 문제가 언급된다. 그 씬에서 선혜는 결혼을 위해 가족(세탁일을 하는 아버지)을 부정하려 한다. 결혼 때문에 선혜가 가족을 부정하기까지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만한 것은 키스씬이 전부다. 그마저도 선혜보다는 종대의 미묘한 감정선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가족이란 별다른 이유 없이(예비 시댁의 눈치를 보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부정되는 대상이다. 또한, 선혜가 남편에게 두 번 매를 맞고 (짐작건대) 이혼하는 사건을 보자. 도박에 중독된 남편은 처가의 실상을 깨닫고 선혜를 막 대한다. 가족은 결코 사랑으로 지탱되지 못한다. 종대는 선혜를 때린 처제를 한 번 용서하나, 두 번째에는 도박장에 찾아가 쥐 잡듯이 팬다. 이후 선혜가 등장하는 씬에서 이미 선혜는 남편을 떠나 있다. 영화는 이혼을 통해 한 가정이 붕괴하는 과정을 간편하게 생략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족의 위치는 다음 부분에서 가장 잘, 그리고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용기가 길수를 죽이는 씬과, 종대가 길수의 집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열하는 두 씬 사이는 이상하게 멀다. 길수가 죽은 뒤, 용기와 종대가 차에서 만나는 씬에서 용기의 목에 난 생채기를 (종대의 시선으로) 비추는 쇼트는 사실상 종대가 길수를 죽였다는 용기의 의심을 암시한다. 나중에 잠깐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쇼트에서 이는 확증된다. 종대는 용기가 길수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이후 종대는 예전부터 계획해왔던 대로 용기와 힘을 합쳐 기택(정호빈 분)의 세력을 무력화시킨다. 일을 끝마친 이후에야 종대는 길수의 죽음을 처음으로 슬퍼한다. 자신을 사실상 아들로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쇼트와 함께. 결국, 영화에서 아버지(혹은 가족)는 대의나 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잠시 젖혀둘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3. 막장 코드와 선혜

 

<강남>에는 막장극적 요소들이 종종 등장했다. 영화 초중반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막장극은 여러모로 음모론과 닮아있다. 음모론은 그럴듯하지만 ‘설마’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려운 인과관계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지젝도 그랬듯) 음모론에는 결함이 없(어야 한)다. 음모론의 신빙성은 전적으로 ‘완전무결한’ 구조에 달린 것이다. 막장극도 마찬가지다. 막장 드라마의 시초격인 <아내의 유혹>(SBS, 2008-2009)을 보고 나는 철저하게 짜인 드라마 구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작가의 뛰어난 두뇌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막장 드라마에서 철저한 구조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드라마의 구조에서마저 빈틈이 생긴다면, 막장 드라마는 그냥 몽상이나 헛소리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음모론이나 막장극 둘 다 부족한 신빙성을 구조적 완결성으로 채운다. 

 

그런 의미에서 <강남>의 초중반 부에 벌어지는 여러 사건은 막장 코드를 담고 있었다. 철거 이후 종대와 길수의 만남. 종대와 용기의 재회. 위정자들과 조폭들의 얽히고설킨, 하지만 치밀하게 나뉜 관계망. 무엇보다 나는 선혜와 종대의 관계 설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는 종대가 선혜를 마음에 두고 있는 ‘막장’적인 상황을 어떠한 설명도 없이 툭 던져놓는다. 별로 관객의 이해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설정을 생각하기 전에, 선혜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도 의문스럽다. 선혜는 계속해서 영화를, 그녀의 가족과 종대, 그리고 남편을 겉돈다.

 

선혜 역을 맡은 아이돌 가수 설현의 연기력이 부족했던 것도 물론 한몫했다. 솔직히 말해 선혜의 벙찐 연기는 매번 영화의 흐름을 끊었다. 그렇지만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상 선혜라는 존재는 막장 코드 그 자체다. 그녀가 존재함으로써 종대는 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품은 (잠정적) 패륜아가 되고, 막장 그 자체인 그녀의 남편은 쓸데없이 영화로 불러들여 온다. 위해서 말했듯 종대와 선혜의 난감한 관계설정뿐만 아니라, 종대-선혜-선혜 남편이라는 삼각 구도도 마찬가지다. 물론 선혜에 대한 종대의 억눌린 사랑이 처제를 벌하는 데 큰 동력이 될 수는 있었을지라도, 그러한 설명만으로 삼각관계라는 설정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유하에게 묻고 싶다. 선혜라는 존재는 불가피했던 것이며, 그녀의 존재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막장적 상황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고.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