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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투명인간. 회사를 만만하게 보는 예능

작년 우리는 미생을 봤다. 그리고 미생에 열광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생을 소화했다. 누구는 우리네 회사와 너무나 닮아있는 미생 속 원인터네셔널의 모습에 공감했고, 누구는 우정보다 더 끈끈한 무엇을 보여주었던 영업 3팀의 모습에 부러워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라 치부했다.

어찌 됐든 우리는 미생을 통해 현실 속 회사를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는 미생을 집필했던 동기에 대해 대기업의 얘기를 하고 싶었고 평범한 회사원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동안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많이 했다. 기존의 회사를 다뤘던 콘텐츠들은 주로 로맨스에 치중하거나 권력다툼에 주력하며 대다수의 평범한 회사원들은 배제했다. 미생의 차이는 회사를 평범함 속에서 다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평범한 회사, 그곳은 버티는 삶이 미학이었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생은 버티는 삶에 대해 강력하게 물음표를 던졌다.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는데, 또 다른 문 앞에서 버티는 것을 주문받는 회사원들. 과연 버티는 것이 능사인가? 당장 대답하기엔 질문의 무게가 상당했다.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는 질문은 오랫동안 머물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해볼 문제였다.



여기 회사를 다룬 또 다른 콘텐츠가 추가됐다. 2015년의 키워드로 자리매김한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예능, 투명인간은 지난주에 첫 방송을 시작했고 오늘부로 두 번째 방송이었다. 아직 2회분의 방송만이 전파를 탔지만, 나는 회사를 다루는 투명인간의 방식을 도통 존중하기 어려웠다.

 

답답한 일터를 화끈한 놀이터로 만들자는 목적으로 연예인들은 연신 회사원들을 상대로 웃기거나 혹은 괴롭힌다. 100초의 시간 동안 회사원들 앞에서 온갖 반응을 이끌기 위한 시도는 반복됨에 지루했다. 급기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거듭 로션을 떡칠해가며 웃음을 조장하고 또 그것을 박장대소하는 연예인들의 태도가 불편하기도 했다.

 

굳이 회사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사실 웃음을 참는 자와 웃기려는 자의 대결은 회사가 아니라 어디에서나 가능한 포맷이다. 멀게는 ‘전유성을 웃겨라’에서부터, 가까이에는 ‘타짱’까지 철 지난 포맷을 다시 회사 속에 버무린 제작진의 의중이 궁금했다.



강요하는 웃음 아래 회사원들은 웃음마저 독촉받고 있었다. 회사원들이 왜 답답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일시적으로 웃음을 통해 잊어버리라는 식의 투명인간의 태도는 사람들이 왜 직장을 떠올리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전혀 헤아려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답답하게 하는 직장 그리고 답답함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청자들에게 답답함은 당연하고 그것을 잠시나마 웃으며 넘기자고 종용하는 투명인간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대세로 거듭난 회사를 활용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러나 왜 회사가 주목받아야만 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회사를 이용하기만 하는 투명인간이 어쩐지 얄밉다. 이런 식의 회사 예능은 오히려 시대의 요구를 역행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겨우 끌고 왔던 문제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나는 투명인간의 폐지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 예능을 자처한 투명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투명인간의 기획의도인 ‘보이려는 자’와 ‘보지 않으려는 자’ 사이의 대결 속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다만 투명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작금의 시대에 수면 위로 떠오른 현실 속의 회사를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자꾸만 종영된 미생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미안하다. 그렇지만 미생의 여운이 투명 인간이 방영될수록 지속하는 것을 어찌하겠나? 회사는 더 이상 병풍이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회사 속에서 많은 것들을 지켜본 시청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마지막으로 투명인간에게 한석율의 말을 조금 비틀어 해보겠다. “회사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되지 말입니다.”

 

사진 출처 : tvN,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