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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11. 은하고원과 한단지보

 

말하자면 삶과 ‘언어’를 새로 배우는 중이다. 얄궂게도 그 언어들은 모두 예전의 내가 알던 것이다. 문법을 등한시한 채 열심히 하지 않았던 타국의 언어는 하면 할수록 빈틈만 보인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자부심으로 뭉쳤던 평생의 글쓰기조차 고수의 눈앞에서 고작 2주 만에 철저히 무너진다. 삶이 구멍이 송송 뚫린 해면체와 같다. 다만 게으른 자라도 과업처럼 주어진 일만큼은 어떻게든 해내가는 중이다. 여전히 열심히 한다고 말하기엔 하는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움만 남을 뿐.


금요일이었나. 한 번 본 영화를 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가던 귀갓길에서 갑자기 뛰어내렸다. 몸이 지치고 마음은 더 지쳤으므로 쉬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뭔가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핸드폰으로 부랴부랴 시간표를 확인하고, 허둥지둥 표를 끊었다. 찾는 화이트는 없었으므로 다음을 기약. 그러고도 10분 정도가 남아, 백화점을 돌아다닌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하고원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비싸고 파란 맥주병을 들고 신이 나서는, 옆의 술집에 가서 병따개를 빌린다.

 

생각해보면 영화도, 안주로 먹었던 홈런볼 비스무리한 과자도, 심지어 맥주 맛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피곤했던 것일까. 그랬다고 하기엔 졸음조차 쏟아지질 않았다. 그렇게 낯선 이국의 언어와 현실조차 아닌 공간으로 도망간다. 다만, 은하고원은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매우, 달았다.

 

게으름은 병이다. 여기가 바로 바닥이다. 근본도 없으면서 뽐내듯 살던 이는 근육을 잃어 잘 걷지 못한다. 쓸데없는 자존심에 망가졌던 것들은 영 쉽게 돌아오지 않을 성싶다. 그럼에도 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건, 오랜 시간이 걸려 재활이 끝나도 시원찮을 결과를 얻어도 도망가지 않으려 하는 건, 바로 여기가 나의 로도스일 수밖에 없다는,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자각, 때문.

 

다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글이라도 쓰는 것밖에 없으므로. 도망가려는 그 무수한 마음들로부터 도망가려 애쓴다. 비겁한 인생이었지만, 더 이상 나 자신으로부터도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러니, ‘심연’을 만나기 전까진, 쓴다.

 

언젠간 언제고 은하고원을 사들고 ‘도망’갈 수 있을 날들까지 계속.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