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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머릿속이 온통 낯선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 정당 관련 이론들과 제도경제학적, 정치인류학적 내용들로 포화가 되기 시작한 한 달이다. 바빠져야겠다고 스스로 무덤을 판 결과라 어디 누구한테 딱히 하소연할 곳도 없다.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는 일은 빠져들면 진심으로 재밌는 일이지만 부끄럽게도 꾸준히 앉아 뭔가를 공부해본지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사실 사는 것이 영 만만하지가 않다. 지금의 삶과는 달리, 머릿속에서 딱딱 정리가 깔끔하게 돼 있는 기분을 선호하는데, 뭔가를 정리하기도 전에 책장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 때문일까. 아침 수업이라 아침을 먹고 출발해도 수업을 다 듣고 나면 배가 고파 꼭 빵을 한두 개를 사먹는데, 오늘은 그럼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설상가상으로 망중한이랍시고 표를 끊어 놓은 공연 때문에 집에도 가질 못한다. 어차피 바쁠 시간들, 기왕 집에도 못 가는 거 미뤄둔 일을 조금이라고 해두기로 한다. 그렇게 학교에서 학교로 간다.

 

버스를 잘못 타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빵은 먹었지만 그건 밥이 아니므로) 점심을 따로 챙겨먹을 생각이다. 혼자서는 영 먹을 곳이 없는 참으로 빈곤한 곳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볼 때마다 문을 닫았던 것만 같았던 학교 앞 국수집이 문을 열었다. 국수 종류치고 싫어하는 음식이 없지만, 잔치국수는 말하자면 ‘고향 없는 자라도 찾게 되는 고향’과도 같은 음식이다. “겨울 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웃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백석에게 있어 국수가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무엇이듯 말이다.

 

비록, 나 자신이 결코 백석은 될 수 없어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마와 멸치를 삶는 냄새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얼굴로 쏟아진다. 나무로 만든 투박한 의자에 앉아서 멸치국수에 ‘오뎅’을 넣어달라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조용히 식당에 앉아 혼자만이 알 수 있을 쌓인 시간들을 본다.

 

이곳에 앉아있는 ‘나’는, 몇 년 전 새벽을 한참 넘어가던 술자리 중간에 도망치듯 나와 앉아서 국수를 먹던 ‘나’이자, 형들과, 혹은 형과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려 지금 앉아있는 이 식당이 과거 내가 알았던 이들의 단골집이었던 시절의 얘기를 듣던 ‘나’였고, 동시에 오늘처럼 혼자 집에 오가는 길에 들려 조용히 국수를 먹던 ‘나’이기도 하다. 그 사이 많은 시간들이 지났음에도 나만이 아직도 그대로라서, 너무나도 나 자신 그대로여서, 자못 서글프기까지 하다.

 

국수가 나온다. 밍밍한 듯 맑은 국물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오뎅도 그대로다. 김치도 그대로다. 경건하게 치러야만 하는 의식처럼, 아무 것도 넣지 않은 국물을 먼저 맛본다. 약간 굵은 듯한 중면을 삼킨다. 후추를 한 번, 그리고 ‘댕추가루’ 세 스푼. 칼칼하게.

 

B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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