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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0. 감각 잃은 세계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앞서 한 가지 사소한 고백을 하자면, 손가락 끝에 감각이 없어져 가는 듯한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뢰 역시 동일한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한 눈치구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모든 감각이 그대로 살아있지만, 그것이 내 뇌까지 실제로 전달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손가락 끝을 열심히 깨물어보면 분명 아픈 것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기억으로 그 모든 감각들을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현재 내가 느끼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죠.

 

네, 맞습니다. 어떤 믿음도 없습니다. 내 자신의 감각조차 믿지 못하게 된 순간엔, 믿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맛있는 음식들마저도 지금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잘 먹으며 살아가고, 맛도 느끼고, 품평도 하지만 그것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도통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세계는, 서로의 꼬리를 문 기시감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음식에 대한 기행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동시에 재활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미각을 잃은 사람이 스스로의 미각을 찾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활극 같은 겁니다. 가장 강렬하게 갈망했던 것들이 가장 먼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마치 손가락 끝에 닿는 모든 것으로 세계를 확신했던 아이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아무것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와 같은 겁니다. 그 잃어버린 감각이 영원한 상실인지, 아니면 단순한 PTSD인지는 좀 더 경과를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죠. 그건 여러분이 저를 지켜보는 순간, 아실 수 있는 이야기가 될꺼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환지증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래봅니다.  

 

다행히도 제 기억 속에는 많은 음식들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그래서 기억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볼 생각입니다. 사진을 잘 찍지 못하니 보는 즐거움은 드리지 못할 겁니다. 묘사가 탁월한 것도 아니고, 음식 자체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은 것도 아니니 이야기는 어쩌면 흔해 빠진 감상문에 그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 모든 음식은, 말하자면 ‘마들렌’과 같은 겁니다. 잃어버린 감각들의 꼬리들을 그 긴긴 터널의 끝 어딘가에서 찾아 헤매다 보면,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역시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세계가, 어쩌면 우리의 옆자리에서 피어오르는 기적 역시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푸디세이아(Foodysseia)”는 시작됩니다. 검푸른 포도주 빛의 추수가 없는 검은 바다 너머에는 이타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앞으로 제가 여러분과 함께 떠날 여행은 평범하고 흔할 음식들에 대한 에세이인 동시에, 그렇게 기약이 없는 바다를 떠도는 기억과 음식, 그리고 감각을 잃을지라도 살아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