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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현상범들] #6 세계의 끝

category 에세이/3인의 현상범들 2016.09.20 07:30



[학곰군.txt]


넌 놓치고 있어.

뭐를?

사진에서 뭐가 보이느냔 말이야.

말했잖아. 또라에몽.

그것 뿐이야?

뭐 쌓인 책들도 있고 오묘한 나무 그림도 있고.

그뿐이냐고!

왜 갑자기 지랄인데. 뭐 어쩌란거야.

정말로 그것밖에 안 보여?

응. 귀신이라도 보이냐 너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뭔데 그럼.

그을렸잖아.

그게 뭐.

그게 뭐라니. 그을렸대두?

아니 그게 뭐 어쨌다고.

이게 안 보인다며!

그깟 그을음이 뭐가 중요한데?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는 건 너야.

미친놈이. 개소리 할 거면 말 걸지마.

볼 수 있는 것도 못 보면서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 치는 거야.

그깟 그을린 자국 때문에 이 지랄을 하는거야? 뭔데 썅. 들어나보자.

봐. 잘 들어봐 알겠니?

설명이나 해.

알았어. 봐. 사진은 누가 자를 대고 자른 것처럼 똑바르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어.

어. 그러네.

이건 필름 카메라로 찍은 거잖아. 필카는 뭔지 알지?

코닥?

굿. 그럼 너도 알다시피 이게 인화지가 빤딱꺼리는 필름지잖아.

그렇지.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되겠니.

타겠지.

그럼 어떻게 타는데.

활활?

에라이 멍청한 새끼야. 드라마나 영화 한 번도 못 봤냐?

아니 왜 욕인데?

니가 멍청하게 구니까 그렇지. 봤어 안 봤어? 안 봤으면 본 것처럼 설명해줄께.

그야... 보긴 봤지.

어떻게 타?

보통 꼬다리부터 불을 붙이잖어.

그래 그거야.

꼬다리?

그래 모서리. 작두로 잘라서 필카의 사진들은 모서리가 따끔할 정도로 뾰족하지.

그래서.

그럼 상식적으로 이걸 태운 사람은 어느 손을 쓰겠냐?

왼...손?

그렇지. 라이타든 성냥이든 많이 쓰는 손으로 쥐고 불을 붙이기 마련이지.

잠깐만.

뭐.

가스레인지에 붙였으면 말이 다르지. 손이 안 뜨겁게하려면 반대쪽 꼬다리를 잡지 않겠어?

예리했어. 그런데 그건 아닐 거야. 가스렌지의 화력은 라이타나 성냥의 몇 배는 되지. 그리고 불꽃이 전방위로 퍼지고 말이야. 혹 불을 붙였어도 오징어 굽듯이 사진이 꼬불꼬불 해졌을 거야.

그럼 어떻게 저렇게 만든거지?

그래. 그거야.

응?

내가 말한 게 그거라고.

잘나가다 뭔 헛소리야.

잘 봐.

어.

니가 첨에 뭘 봤어?

또라에몽.

그럼 지금은?

그을은 자국.

그래. 또라에몽이라고 답했을 때는 그걸로 끝이다 이 말이야. 찡구야! 하고 성대모사나 하고 어떤 도구가 나올까 기다리게 되는 거지.

그래서?

지금은 어때?

뭐. 뭐가 어떻다는 거야?

왜 사진이 정갈하게 그을어있는지 궁금해하고 왼손잡이가 했겠거니 생각도 했잖아. 니가!

그건 그렇지.

그거야. 문화생활을 즐길 줄 안다는 게. 나는 또라에몽도 봤고 삐까츄 잡으러 속초도 갔고 추석 때 극장가서 밀정도 봤어. 끝. 이건 나는 존나 소비자입니다. 빨리 다음 것을 내놓으시죠? 하는 꼴이라고. 알겠니?

꼰대질 하려고 빙빙 돌려서 말한 거야?

아니. 같은 것을 봐도 좀 네 것을 얻어가라고 새끼야.

으휴. 지적충.

응 아니야. 너무 멍청했고.

앙 지적띠!

됐어. 그냥 꺼져.

응. 뻐큐



[소르피자.txt]


언젠가 도라에몽과 세상의 끝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도라에몽, 세상의 끝은 어때? 넌 타임머신도 있으니 갔다 와 봤을 거 아냐.”

도라에몽은 내 질문에 당황한 듯 갑자기 캑캑 거리며 먹고 있던 도라야끼를 뱉었다.

“진구야! 시간여행은 타임 패트롤들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구! 특히 세상의 끝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 근처에도 가서는 안 돼!” 하지만 나는 도라에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갑자기 다급해지며 똘똘 뭉치는 저 하얀 손. 그리고 충혈된 눈동자.

“도라에몽~ 그러지 말고 조금만 알려주라.”

“아, 안 돼.”

“안된다고? 그럼 알고 있는 거네?!”

“왜 세상의 끝이 알고 싶은 건데!”

“그거야, 그냥 미래가 궁금해서 그래.”

“너 미래에 이슬이랑 결혼한다고 이미 내가 알려줬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세상의 끝을 물어본 건 없던 일로 해!” 도라에몽의 입을 열기란 어려워 보였다. 나는 토라진 척하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도라에몽은 꿈도 모를 것이다. 내가 자기의 ‘무엇이든 말하게 하는 확성기!’를 몰래 숨겨놓았다는 것을.

“짠! ‘무엇이든 말하게 하는 확성기!’. 도라에몽! 이리 와봐” 나는 도라에몽의 입에 도구를 끼우는 데 성공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진구야 악! 읍읍!”

“자 이제 말해봐. 세상의 끝은 어때?” 도라에몽은 입을 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가 만든 도구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읍읍! 세상의 읍! 끝은 너무나 잔인하고 슬퍼서 표현하기조차 읍읍! 어려워!”

“옳지 잘한다!”

“세상의 끝이 온다는 건 캑캑! 곧 종말과도 같은 거야! 캑캑 세계는 사라지고, 우리 역시 흔적도 없이 서서히 무에 잠식해가지! 캑캑 진구야 너 정말 이럴, 켁켁”

잠깐, 근데 왜 내가 그때 세상의 끝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 아니었을까? 나는 늘 겁이 많았다. 어떤 일이 나에게 닥칠 때 그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일의 끝인 세상의 끝 역시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종말이 시작되면, 아무것도 있지 않은 하얀색의 커튼이 우리를 삼킬 거야. 우리는 거기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살아남을 수도 없어.” 그러나 나의 처음 호기심과는 다르게 도라에몽이 뱉는 말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얀색의 어둠이 나를 삼키고, 세계가 끝나버리는 것을 상상하니 저절로 무서워졌다. 그러나 도라에몽의 한번 뚫린 입은 거침없이 무서운 단어를 계속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지끈 감은 채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때, 확성기가 내 앞으로 굴러떨어졌다. 도라에몽이 스스로 도구를 입에서 떼어낸 것이다. 도라에몽은 반쯤 넋이 나간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구야, 다음부터는 이런 장난 절대로 치지마. 나 지금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아졌어…. 그리고 내가 뱉은 말은 다 잊어버리길 바라.”

“으응….”

그 일이 있었던 뒤 도라에몽은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꽁치통조림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서 어디론가 나갔다. 나는 도라에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는 그런 장난과 호기심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내가 먼저 용기를 내어 그에게 사과했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 다음엔 그런 거로 장난치지 않을게. 정말이야 도라에몽. 내가 잘못했어.” 나는 내 방 한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말했다.

도라에몽은 사과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웃고 떠들며 지냈다.

어느 날, 다다미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나에게 도라에몽이 말을 걸었다.

“진구야, 세상의 끝이 자꾸 생각나지 않아?”

“음…. 가끔. 근데 계속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정말 무서웠거든.”

“미안해. 무서운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아니야, 네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도라에몽. 내가 잘못한 일인걸.”

“그래. 진구야. 내가 그때 말했던 거. 세상의 끝에 대해서. 그게 꼭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 그러니깐 너무 무서워하지 마.”

“알았어. 도라에몽. 나 오늘 너무 피곤하다. 숙제하느라 늦게까지 너무 힘들었어. 나 먼저 잘게 도라에몽.”

“그래 진구야 잘 자.”

다음날 나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도라에몽은 아직 자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는 이슬이, 퉁퉁이, 비실이와 함께 놀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들어왔다. 그런데 도라에몽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도라에몽 어디 갔어요?”

“도라에몽? 그게 뭐니 새로 나온 장난감 이름이니?”

“네에?”

나는 그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도라에몽을 찾으러 다녔지만, 개미 한 마리조차 볼 수가 없었다. 해는 지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다시 우울해졌다. 나의 곁을 지켜주던 친구. 그가 없으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온갖 진귀하고 신기한 도구들. 그걸로 도라에몽은 날 구해주기도 하고 모험을 떠나기도 했었는데. 나는 잠자리에 울며 조용히 훌쩍였다.

그 뒤로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매일 도라에몽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그건 마치 아이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몇 밤만 더 자면 온다는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또한 마쳤다.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양이 인형을 하나 사서 도라에몽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무생물인 그것에게 도라에몽의 역할을 기대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다. 나는 도쿄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기숙사로 방을 옮기게 되었다. 나는 며칠 동안 이사준비를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나는 짐을 싸다 말고 밖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동네에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섰고, 나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을 초등학교 아이들도 하나씩 들고 다녔다. 문득, 도라에몽이 나에게 주어졌던 ‘언제 어디서나 얼굴을 보며 말할 수 있는 통신기!’가 생각났다. 도라에몽은 나에게 미리 신기술을 알려준 셈이었다. 창문을 타고 벚꽃 향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벚꽃 몇 잎도 방으로 떨어졌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나머지 짐들을 마저 쌌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퍼런 고양이 같이 생긴 것이 나타났다. 도라에몽이었다.

“도라에몽….” 나는 너무 놀랐다. 그리고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진구야! 잘 지냈어?” 도라에몽은 특유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동안 어디가 있었던 거야 도라에몽!” 나는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의 머리는 이제 내 배꼽 언저리밖에 닿지 않았다.

“그냥 이것저것 하느라 갑자기 없어졌던 거야. 미안해.”

“으흙흙…. 너가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너 이사준비 하고 있었나 보구나. 도쿄로 가는 거니?”

“으응…. 내일 바로 가게 됐어.”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렇구나….” 도라에몽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냉장고에 도라야끼 있는데 갖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나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너한테 온 거야. 그것도 아주 아주 중요한.”

나는 갑자기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도라에몽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나는 그 어색함을 참지 못했다. 이사박스 안에 있던 고양이 인형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네가 없어지고 나서 나 이걸 샀었어.

 벌써 6년도 넘었지 뭐야. 이렇게 낡은 것 봐. 근데 네가 다시 돌아와서 기뻐. 나랑 같이 도쿄로 가줄 거지?”

“진구야….”

“왜 답을 못 해.” 

“전에 세상의 끝에 대해 말한 적 있었지? 너에게 오랜만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그게 오늘이란 걸 알게 됐어.”

“뭐라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럼 그 하얀 커튼이니 뭐니 빠져나가고 싶어도 모두 다 죽어버리는 게 오늘이란 말이야?”

“응. 그렇게 됐어. 미안해. 이런 말이나 하고. 사실 내가 없어졌던 건 너의 질문을 듣고 세상의 끝이 ‘정말로’ 언제인가가 궁금해서였어. 너에게 뱉은 말들이 후회돼서. 직접 타임 패트롤들을 피해 다니며 날아다녔어. 그런데 그게 오늘이더라.”

“싫어! 그건 있을 수 없어! 나 이제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이슬이랑 아직 결혼도 못 하고 ! 그럼 내가 봤던 미래들은 다 뭐가 되는 거야!” 나는 울부짖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대신, 세상의 끝이 오기 전까지 너와 있을 거야.”

“도라에몽….” 나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때 나의 방구석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도라에몽이 말했었던 하얀색 커튼이었나? 하얀색 어둠?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고 마는. 그 커튼은 서서히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상자들이 하나씩 빨려 들어가고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도라에몽을 더욱 꼭 껴안았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그를 만난 일.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동네의 뒷산까지 올라갔던 일. 퉁퉁이에게 벙어리 약을 먹인 일. 수없이 많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 그 하얀색 커튼은 내 발밑에까지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라에몽이 원망스러워졌다.

“진구야, 기억해. 세상의 끝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지금은 사라지지만, 영원히 기억될 거야.” 내 품 안에 있던 도라에몽이 속삭였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이제 하얀색 빛은 내 몸을 덮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전에도 도라에몽의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도 나가본 적이 있다. 딱 그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다.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내 책상 위에 있던 고양이 인형이 도라에몽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진구야, 짐은 다 쌌니?” 엄마가 아래층에서 올라와 나에게 물었다.

“네…. 거의 다 쌌어요. 잠깐 졸았었나 봐요.”

“그래, 너무 늦게 자면 내일 못 일어나니 정리하고 잠자렴.” 나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 난 듯 엄마를 불렀다. “저기, 엄마!”

“응?”

“제 책상에 있는 저기 저 푸른색 고양이 인형. 언제부터 있던 거에요? 되게 낡았는데….”

그러자 엄마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거, 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사준 거잖니. 인형가게 앞에서 어찌나 저 인형만 보고 있던지. 나는 더 예쁜 걸 사주고 싶었는데, 너는 저것만 사달라고 얼마나 졸랐던지….”

“제가 그랬다고요?”

“그러엄. 네가 저걸 얼마나 아꼈는지 아니? 항상 옆에 가지고 다니면서 아이들이랑 놀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오곤 했잖니.” 나는 무언가에 내리친 듯 충격을 받았다. 아, 그랬었나. 도라에몽이 말한 세상의 끝이 이것이었나? 세상의 끝, 세상의 붕괴. ‘나’의 세상의 붕괴. 유년 시절 쌓아 올린 나만의 세상. 대나무 헬리콥터, 통역곤약, 옷 갈아입기 카메라, 시간보자기...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 상상력이 많은 소년이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늘 미래를 생각하고, 나의 세상이 무너질까 두려워 세상의 끝에 대해 도라에몽이 물어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책상 위에 있는 파란색 몸통에 하얀 배를 가진 고양이 인형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며 지금 울고 있는 나를 달랠 것처럼. 



[호래.txt]


  추석을 맞아 시골에 내려왔다가 고향집에서 도라에몽 인형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한테서 훔쳤던 인형이었다. 그 친구는 놀이터에서 이 도라에몽에게 온갖 애정을 다 보였고, 번듯한 인형 하나 없었던 나는 샘이 나서 친구 몰래 인형을 내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혹시나 훔친 걸 걸릴까 하는 두려움에 제대로 가지고 놀지도 못하고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그랬던 인형이 여전히 내 방 구석에서 먼지만 쌓인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인형을 가지고 놀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현상소.jpg]




[벼.txt]


1.

 

부끄럽지만 제 자취방입니다. 필카를 잡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사용한 필름롤에 담겨있더랬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 남지 않은 컷을 채우기 위해 집 안 여기저기서 셔터를 누르는 중에 찍'힌' 사진입니다. 말하자면 반토막나 그럴듯해 보이는 이 사진은 제 의도를 100% 벗어난 셈입니다.


2. 


사실 인류 멸망의 판타지는 '인류가 멸망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는 판타지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세계 최후의 한 사람인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인류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즉 인류도 멸종할 수 없습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3.


The Tree of Life. 1909. by Gustav Klimt.


4.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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