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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래.txt]


술을 마셔서 정신이 조금 멍한 상태로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에는 검은 선이 몇 개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르겠다. 섬 같기도 하고 산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하고 육지 같기도 하다. 화장실을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처럼 그림을 보고 있지만 사실 그림엔 별로 관심이 없다. 무엇을 그린 지도 알 수 없는 그림 따위 봐서 무얼 하나. 그냥 술자리엔 바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분위기 맞추며 앉아 있는 건 고역이다. 개새끼들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술을 마시면 나는 조금 더 감정에 솔직해 진다. 아니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딘가 과장된 면이 있다. 사실 걔네들은 나한테 그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한테 무관심하다는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자기어필을 못한 내 잘못이지.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이런 문제가 없었는데. 사람이 적은 시골에선 존재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지만 도시에선 끊임없이 자기 증명을 해야 한다. 으악. 소리를 지르고 싶다. 나 여기 살아있다고 알리고 싶다. 하지만 난 언제나처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잘 못 먹는 술을 홀짝거리며 바보같이 웃는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지 알 수 없는 그림처럼, 무채색으로.



[학곰군.txt]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플롯 때문이란 거야.

  

  동석은 자못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뭔 짓을 하는 지는 내가 알 바가 아냐. 다만 최소한... 일에 순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


  동석은 이제 아예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씨팔. 그래. 이런 타이밍에는 씨팔하고 욕을 해줘야지.

  씨팔은 개뿔. 만날 뭐만하면 씨발이든 씨팔이든 중얼거리는데 뭐 그거 도대체 왜하는 거냐.

  욕은 자연스러운 거야.

  아니. 욕 안 쓰고도 말할 수 있어.

  흘러가는 대로 리얼하게 써야지.

  씨발씨발 거리는 게 리얼이냐 씨발?

  너도 욕했잖아 씨팔.

  씨팔을 마침표처럼 쓰는 너랑 내가 같아?

  아니. 그럼 뭘 쓸 건데?

  뭘 쓰다니.

  말을 해도 말귀를 못 알아먹을 때. 코앞에서 얘기해도 못 알아먹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볼 때. 빡이 치는데 대놓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때. 자조적으로다가 하... 씨파... 이 말 말고 어떤 말을 써?

  씨발.

  그래 씨팔.

  그런 상황을 안 만들면 되지.

  여태 뭘 들은 거야. 플롯을 따라가면서 주인공이 그 상황을 맞닥뜨려야만 한다니까.

  아니 그 놈의 플롯. 플롯. 리얼한 세상은 그렇게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않아.

  그렇지.

  응?

  그렇다고. 리얼 월드는 딱딱 아다리가 맞아들어가지 않지.

  근데?

  그래서 주인공들이 씨팔 소리나는 현장에 부닥치는 거라고.

  그럼 리얼이 아니잖아. 

  말했잖아. 리얼 '하게'라고

  하게? 가짜란 말이야?

  가짜가 아니지. 리얼하게 라니까.


  나는 짜증이 치밀었다. 동석은 그 놈의 욕 좀 글에 쓰지 말라니까 말 같지도 않는 개똥철학으로 헛소리를 하고 앉았다.


  생각해봐. 네가 쓰는 글이 일상 같다면 말이야. 일어났다 밥 먹었다 일했다 쌌다 잤다. 시간 순에 빤한 이야기잖아.

  나 그렇게 재미없게 살진 않아.

  그래. 너는 재미있겠지. 근데 읽는 사람들은 너를 생판 모르는 양반들이야.

  그래서?

  그래서 읽었을 때 재밌게 조작을 하는 거지. 어떡하면 흥미롭게 읽힐까.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이 재미가 있을까.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난 나를 위해서 글을 쓰니까... 그래서...

  개소리 하고 있네. 너를 위해?

  떠. 날. 꺼으. 야아아.

  그럼 집에 가서 혼자 벽 보고 붓글씨나 쓰지 왜 여기서 지랄이야 지랄은?

  욕 좀 그만하라고 씨발. 욕 많이 써서 리얼해지겠다. 증말로. 아주. 응?

  내가 왜 욕을 내 글에 넣는 줄 아냐?

  리얼하게 이자식아.

  아니. 왜 그게 리얼 한 건 지 아느냐고.

  욕을 쓰는 게 자연스럽다며.

  아냐. 일상에선 욕 많이 안 써.

  그건 리얼이 아니잖아!

  하지만 욕은 쓰지. 마음 속으로들.

  그래서?

  리얼 월드에서 사람들이 맘 속으로 쓰기는 하니까 전혀 거짓은 아니야. 대리만족인 거지.

  대리 운전이나 불러.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고. 차 가져 왔다며.

  그거야. 말 같지 않은 소리.

  잘 아는구나. 우리네 쓰는 글들이 그런 거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누가 그렇게 주인공들처럼 사서 고생하냐. 집에서 그냥 누워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길 텐데 말야.

  알았다. 이 자식아. 이 플롯충아.

  그렇지. 난 플롯충이니까.

  그럼 이 분위기는 어떻게 끝내게?

  그러게 대리 부를까.

  인생은 플롯이 아냐 이자식아.

  그렇네.

  리얼하게 살아. 리얼을.


  동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머쓱하게 벽을 바라보았다. 애써 눈을 피하는 것만 같았다.



[소르피자.txt]


그는 바가지 머리를 하고선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술집으로 데려갔다.

“여기, 불닭발 하나랑 소주 두 병 주세요.”

오랜만에 본 그는, 달라져있었다. 특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줄로 이어져있는 바가지 머리가 너무나 웃겼다. 흡사 ‘레고’처럼 그의 머리를 잡아당기면 그 형태 그대로 쑥, 하고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그는 답이 없는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뒤에 앉은 아이들이 그의 머리에 연필이나 펜 따위를 꼽기도 하였다. 신기하게도 한 번 그의 머리에 꽂힌 펜은 수업시간이 끝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움켜진 문어처럼, 그의 머리는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그가 아닌 줄 알았다. 그는 연신 소주를 들이켰다. 

“야, 좀 천천히 마셔라.”

“술은 마셔야 남는 거라 그랬다.” 갓 대학을 들어갔던 시절,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며 몸을 비틀거렸던 그는 어느새 소주 반병을 홀로 돌파하고 있었다. 초점이 없던 눈도 술을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바꾸어버린 것일까? 

“머리는 어떻게 된 거냐? 원래 곱슬 엄청 심했었잖아.”

고등학교시절, 두발검사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곱슬머리인 그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삼손처럼, 머리가 잘려나가면 자신의 아이덴티티 역시 없어진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그의 머리스타일이 세련되거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꼬인 머리처럼 말도 먹었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했었다.

“그게 말이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붓으로 일필휘지, 줄기를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잎을 그린 것 같기도. 시원한 한 번의 터치로 그림은 올곧아 있었다. 

“계속 짧게 밀다보니 어느새 직모가 되어있더라.” 

그 역시 군대를 가야했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머리는 짧은 잔디처럼 정돈되어 있었다고 했다. 곱슬머리도 그 길이가 짧다면, 꼬일 새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뭐,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그와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어딘가로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펴져버린, 더 이상 구부러지지 않는 머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그림에 걸린 올곧은 잎의 줄기처럼. 하지만 나는 그의 지금 모습이 좋아진 건지, 나빠진 것 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무엇이 옳았던 것인지 따지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양치를 하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의 직모와 어머니의 곱슬머리를 반반 닮은 나의 반곱슬 머리. 이거야 말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닌, 한붓그리기로 표현이 안 되는 애매함의 표상이 거울 속에 서있었다.



[현상소.jpg]




[벼.txt]


아는 동생 N입니다. 장소는 대학로의 한 술집입니다. ‘품’이라고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 맛있습니다. 저렴하기도 합니다. 종종 갑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잘 안(못) 찍습니다만, 인물사진을 찍게 될 경우를 대비해 정해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콘셉트를 확실히 하자’죠. 특히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좋습니다.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캐릭터, 상황 등을 일일이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죠. 설정이 구체적일수록 피사체의 표정이나 몸짓은 살아나고 사진 전체의 분위기도 꽃피우기 마련입니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N과 술을 마시는 중 내내 뒤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갔는데, 이를 배경으로 한 컷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N에게 주문했습니다.  



“너는 한 이름 없는 작가야, 무명 화가. 이름은 K정도로 하자. 돈에 늘 허덕이고 있지. 어느 날 친구가 술자리에 너를 불렀어, 사주겠다며. 기분 좋게 갔지. 그리다 만 그림은 내팽개쳐두고. 도착하니 좁디좁은 술집에 친구 놈은 이미 술 한 병을 까고 있네. 짧은 악수와 긴 안부를 나누고 너도 본격적으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어. 공짜니까 평소보다 좀 빨리 마셨겠지. 한 30분쯤 지났을까, 친구 놈이 니 뒤를 가리키며 말하는 거야. ‘저 그림 멋지지 않냐. 한 번 봐봐봐.’ 그런데 말이야, 글쎄 뒤돌아보니 거기에 니가 그린 그림이 걸려있는 거야. 팔리지 않는 그림. 돈은 쥐뿔도 안 되는 그림. 홧김에 온라인에 올려 누구나 공짜로 퍼갈 수 있게 만든 바로 그 그림이 바로 니 등 뒤에 걸려있단 말이야.


자,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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