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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3인의 현상범들

[3인의 현상범들] #1 기억할 만한 지나침


[호래.txt]


사실 너의 불행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어. 미안. 생각해보면 널 안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도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힘들었겠다고 말할까.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지. 너는 그런 나의 태도에 실망했고. 하지만 사실 네 부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었잖아.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도 어울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내뱉으며 너의 한쪽 손을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그 위로의 말과 몸짓이 스스로도 너무 가볍게 느껴지면 어쩔까 두려웠거든. 원래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위로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어. 섣부른 충고는 주제 넘는 행동같고 기계적인 위로는 위선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사실 그리 큰 관심도 없다는 게 정답이겠지. 이소라의 노래가사처럼, 불행은 평범하고 고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누구나 갖고 있는 불행을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늘여놓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야. 그러니 너의 불행을 알아서 잘 추슬러서 이겨내길 바랄게. 나도 나의 불행을 상대하려고 노력할게.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잖아. 서로가 상대할 수 있는 정도만 우리 의지하자. 그럼 이만.



[학곰군.txt]


사람의 인성을 두고 옛날옛날 글줄깨나 읽으신 분들은 논쟁을 했더랬다. 태어날 때는 착하기에 본성대로 살자는 성선설, 나면서부터는 악한데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인위적으로 나아진다는 성악설, 성선도 성악도 아니요 살다보면 뭐라도 된다는 성무선악설까지. 나는 윤리 교과서에서 마주한 그 분류법이 싫었다. 셋 다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굳이 선택하자면 나는 성무선악설 파였다. 살다보면 포켓몬스터의 이브이처럼 어느 방향이라도 진화해가지 않겠는가. 다만 한 번 한 속성으로 진화를 해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살다보니 사람이라고 꼭 이브이마냥 무궁무진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 같지는 않다. 꼬부기가 ‘살다보니’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없고, 파이리가 ‘살다보니’ 물대포를 쓸 수 없듯 아마 인간에게 주어진 인성도 사람마다 다를뿐더러 진화 방법도 방향도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우리가 평소에 쓰는 말로 바꾸면 "사람 쉽게 안 변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특히 나이가 차고 스스로 ‘판단’을 할 줄 안다고 믿는 시점(대개는 성인)을 지난 다음부턴 더더욱 어렵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내 안의 ‘나’는 점차 공고해진다. 그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귀가 닫히고 입이 열리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나머지는 필터링하며 지 할 말만 늘어놓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왜냐? 이미 내 안에 자리를 잡은 ‘나’는 스스로 판단을 하고 단정을 짓고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인간은 비극적인 동물이다. 스스로 판단을 하면서도 우리는 매일 타인과 부대끼고 대화를 할 수는 있다. 눈과 입은 개폐식이지만 귀는 상시개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고, 들으면서 듣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망할 속성, 생득적으로 당연히 그러할 수밖엔 없는 인성 중에 하나가 아닐까.


나는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그리고 죽은 듯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라는 구절을 새삼 되뇌며 주어진 본성을 거역해본다. 세상과 구분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다. 진화를 하지 않는 이브이가 되고 싶다.



[소르피자.txt]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가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은 서서히 형체가 없어지고, 나의 몸은 찐득한 타르로 덮여갔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혀버린 것 같아 너무 답답했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발밑은 진한 청색의 고점도의 물질이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이건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생각했다. 때는 초겨울, 침엽수를 제외하곤 나뭇가지들은 그 맨몸을 다 드러낸 채 으스스 떨었다. 그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모세혈관의 피들이 갈색으로 굳어버린 것 같다. 이미 순환을 멈추어버리고, 똑 건드리면 딱, 하고 뿌려질 것 만 같다.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채 겨우겨우 그 검은 타르 거죽 데기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 후 꼭 일 년, 그 곳에 다시 찾아왔다. 시린 초겨울. 나뭇가지들은 한 해 동안 부피생장을 했다. 하나를 부러뜨려 나이테가 하나 더 많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탈출했던 검은 번데기, 누구도 치우지 않았는지 내가 도망쳤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딱딱하게 변해버린 그것은 속이 비어서인지 두드려보니 공명이 났다. 나는 다시 자리를 뜨려고 움직였다. 근데 저 뒤에, 검은 타르로 둘러싸여 있는 또 다른 물체를 보았다. 머리 높이에서 잘려나간 나무인줄 알았는데. 나는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건, 너였다. 나는 그 검은 조각상을 똑똑똑 뚜드렸다. 하지만 그것은 공명이 나지 않았다. 속이 꽉 차 있는 나무처럼, 둔탁하고 무거운 느낌이 내게 전해졌다. 너는 고개를 숙인 채 검게 변해 있었다. 그때 나는, 네가 먼저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급히 내가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배경, 그곳에 흐릿하게 굳어있는 너를 그제야 발견했다. 아직도 네가 여기에 들어있는 걸까? 나는 안간힘을 쓴 채 나무껍질을 벗기듯 너를 둘러싸고 있는 그것을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무껍질처럼 쉬이 벗겨지지 않았고, 나뭇가지처럼 부러지지도 않았다. 머지않아 내 열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환을 의미했다. 나는 끝내 그것을 벗기는 것을 해내지 못했다. 나는 피가 나는 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나 이번 초점은 너에게 맞춰져있었다. 


나는 일 년 전처럼 또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너의 체온이 느껴진다. 


초겨울, 침엽수를 제외하곤 나뭇가지들은 그 맨몸을 드러낸 채 으스스 떨었다. 그 나뭇가지들을 보고 있노라면 겨울을 나고 새 봄을 준비하는 생명의 태동이 느껴진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똑 건드리면 딱,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꽃봉오리를 지닌 채. 



[현상소.jpg]




[벼.txt]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있는 동상 두 개를 초점을 달리 해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진 두 장을 위아래로 이어붙인 거죠.


사진의 의도는 시 한 편과 소설 한 구절로 대체하겠습니다.



1. 기억할 만한 지나침(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때 현이 그녀의 몸을 잡아끌었다. 바다를 따라 모든 것을 지나쳐 흘러가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코와 입에서는 바닷물이 흘러나왔다. 현은 그런 그녀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녀를 일으켜세우느라 엉거주춤 서로 껴안는 자세가 됐을 때, 눈물과 바닷물 너머로 방마다 불을 밝혀놓은 호텔 건물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 불빛 어디쯤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서서 밤바다를 바라봤는지 정신없지 찾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물이 빠졌으니까 이제 그녀는 마음껏 울 수 있었다.


- 김연수, <기억할 만한 지나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