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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현상범들] 모든 것의 시작

category 에세이/3인의 현상범들 2016. 8. 3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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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별밤에서 ‘벼’를 맡고 있는 벼입니다. 제가 최근에 필름카메라라는 요물에 맛이 들려서 이곳저곳에서 이것저것을 찍고 돌아다니는데요. 최근 특이한 경험을 하나 해서 말이죠.

 

다들 아시겠지만 필카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달리 현상라는 작업을 (무려 현상소에 직접 찾아가서) 거치기 전까지는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앞에 있는 이미지(기왕이면 애인이 좋겠죠)를 카메라 속에 담아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작업이야말로 필카의 정수라는 점은 분명하니까요. 


 

다만 제가 ‘가늠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과 현상된 사진을 볼 때까지의, 그 사이의 무지막지한 간격을 표현한 것이다, 이 정도로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필카를 좀 찍어보신 분들을 이해하실 텐데요. 저 같은 경우 설렘 가득 제 눈앞에 놓인 결과물을 볼 때마다 ‘내가 언제 이걸 찍었지?’라는 생각이 매번, 진짜로 매번 뒤따라옵니다. 앞서 사진을 찍을 때 보았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죠.

 

특히 촬영과 현상 사이 시간적 간격이 멀면 멀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한 번은요. 4월 달쯤에 찍었던 사진을 3개월 뒤에야 찾았던 적이 있는데요. 그중에서는 끝내 ‘이걸 왜 찍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사진도 있...

 

어쨌든 이렇게 필카로 찍는다면 때론 셔터로 담으려던 (아까 말했지만 이왕지사 애인의) 이미지보다 훨씬 느낌 있는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빛이 과다하게 들어와 그냥 새하얗게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진들이 그렇죠.

뭘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웬 실지렁이(?)가 보이네요.

 

이건 뭘 찍었는지 확실히 기억납니다. 통영 게스트하우스에 누워 있는 친구 Y죠.

 

이 사진은 어디서 누구를 찍었던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 말이 길어졌는데 이제부터가 핵심입니다. 집중해주세요.

 

이 부분이 굉장히 미묘한 게 필카의 이런 점은 형용할 수 없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상한 환희를 불러일으킨단 말이죠. 저에게 매번 주어지는 낯선 사진들은 분명 ‘왜곡’입니다. 내가 어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게 가끔 그럴 듯 해보일 때가 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가상’의 이미지에 끌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게 굉장히 오묘해요. 혼란스럽기도 하죠. 내가 담고 싶었던 그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기분이 나쁘면서도 그보다 더 나은 결과물이 떡하니 나와 있으니 만족스럽기도 하단 말이죠. 뭐랄까요, 있어보이게 말하자면 시뮬라크르인지 시뮬라시옹인지, 뭐 둘 중 하나랄까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맛에 필름카메라, 필름카메라 하는 거라구요. 네, 이 말 하려고 했는데 말이 길어졌네요. 너무 늦은 고백이긴 하지만 여기까지는 안 읽으셔도 됩니다. 아래부터가 진짜예요.

 

 

**

 

혹시 ‘필름 현상범’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범’이라는 강렬한 단어에 짐작들 하셨겠지만, 아니 글쎄 제가 살다 살다 현상을 도둑질을 당했지 뭐예요. 그것도 세 번씩이나, 어휴.

 

현상을 도둑질 당했다는 말이 도대체 말이냐 방구냐고요? 예, 저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게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사진을 찍고 다니면서도 느낀 바이기도 하죠.

 

소르피자, 학곰군, 호래. 이 세 놈들을 조심하세요. 아주 악랄한 놈들입니다. 네? 아, 알겠어요. 성미 급하시긴. 이제부터 썰 풀게요.

 

여느 때처럼 저는 필름을 맡기러 현상소에 가고 있었어요. 지하철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유심히 제 필름을 바라보는 거예요. 문득 필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군요. 자기를 ‘소르피자’라고 짧게 소개한 그 사람은 “새로 개발한 현상술이 있는데, 실용화 하기 전에 다양한 필름을 찾아 적용해보고 있어요. 공짜로 해드릴 수 있는데, 어떠세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시에는 뭐 딱 보기에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기도 하고 공짜라니 한 번 맡겨보자,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었지만요.

 

소르피자를 따라 “자기 작업실”이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 보니 동료인 듯 보이는 사람이 둘 더 있습디다. 예, 학곰군이랑 호래였죠. 그놈들은 제 필름을 받고는 바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버리더군요. 한 30분쯤 지났을까.

 

“다 됐습니다. 현상한 자료는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현상된 필름을 건네받고는 집에 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에 들어갔죠.

 

그런데 웬걸. 첨부파일에 이미지 파일은 없고 죄다 텍스트 파일뿐이었죠. 예를 들어 ‘000001.jpg'가 아니라 ’000001.txt'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각 번호마다 소르피자, 학곰군, 호래의 이름을 넣은 파일이 세 개씩 있더군요. '000001-소르피자.txt', '000001-학곰군.txt', '000001-호래.txt' 이렇게요. 

 

예, 이 사기꾼 놈들은 제 귀중한 사진을 갖고 사기를 친 겁니다. 새로운 현상술은 개뿔. 온 정신을 하나로 모아 정성들여 찍은 제 사진을 가지고 한 놈씩 자기 감상을 멋대로 글로 휘갈겨놨더군요.

 

다행히 현상된 필름을 받아왔던지라 다음날 ‘제대로 된’ 현상소를 찾아 사진 스캔본을 받아냈습니다. 사진을 하나씩 보다보니 막상 꼴보기도 싫은 그놈들의 글이 떠오르더군요. 글을 띄어서 사진들과 일일이 비교해봤죠. 하, 가관이더군요. 글 하나하나가 얼마나 제 사진, 제 의도를 곡해하고 있던지. 그건 마치, 마치, 말하자면 사과를 가리키면서 배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어떻게 그런 사진에서 저런 내용이 나올 수 있는지.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누군가 ‘새로운 현상술’ 운운하며 접근하면 재빨리 도망치세요. 특히 그게 소르피자, 학곰군, 호래 중 하나라면 더더욱. 현상을 빼앗기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이죠.

 

예? 원본이 뭐냐고요? 뭐긴 뭡니까. 제 필름에 담긴 이미지들이죠. 뭐라고요? 예, 맞습니다. 물론 필름에 담긴 이미지의 원본을 따지자면 뭐, 제가 셔터를 누르기 전에 뷰파인더로 봤던 바로 그 이미지겠죠. 그리고 그 이미지의 원본을 생각해본다면 뷰파인더를 거치지 않고 거기 그대로 존재하는 그녀겠죠. 그 원본은 또... 예, 뭐 그렇게 따지고 들어간다면 끝이 없으니 그만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단언컨대 제가 정성스레 담아낸 원본을 그놈들이 왜곡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거랑 현상된 이미지랑은 분명코 다르죠. 뭐가 다르냐고요? 다르죠. 글이랑 이미지랑 어떻게 같습니까. 사과 그림이랑 ‘사과’라는 단어가 똑같다고 생각하세요? 왜곡하는 것은 똑같다? 하, 말이 안 통하시는 분이군요. 둘은 전혀 달라요. 아, 글쎄, 그거

랑 그거랑은 완전히, 100퍼센트 다르다니까요??

 

자, 이걸 보세요. 어서요. 그놈들이 쓴 글들과 제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시라구요. 뭐가 ‘진짜’인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by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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