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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이웃집에 신이 산다> 태초에 억압이 있었으니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태초에 억압이 있었다. 억압은 찰나에 모든 곳으로 퍼졌다. 

 

억압은 무엇인가. 억압은 현상이다. 달리 말해, 시간과 그물의 불협화음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렇게 시작해보자. 태초에 시간이 폭발했다. 광포한 시간은 뒤를 제외한(하지만 시간이 부재하는데 뒤란 게 있을 리 없다, 아무튼) 모든 곳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 위로 그물이 깔렸다. 존재는 그물로 말미암아 태어났다. 촘촘히 짜인 그물은, 그러나 태초에 이미 짜여있었다. 그물에 대해 말하자면, 시작이 곧 끝이었다. 시간의 문이 열린 순간에 그물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물은 곧 존재였고, 존재는 그물로 하여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물은 언어로서 가장 순수하게, 그리고 최초로 현현할 수 있었다. 끊어지지 않는 소리는 특정 크기로 조직된 그물로 절단되었다. 이렇게 a와 e는 구분되었고, 발악은 발화가 되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하나하나 불렀다. 그때 ‘동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정해졌다.’ 아버지로서 신은 아담을 창조하고, 동물은 아담 즉, 남성의 언어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말이 어려웠다. 핵심만 되짚어보자. 태초에 억압이 있었다. 억압은 시간과 그물의 기묘한 협주곡이다. 그물은 언어로 현현하여 존재를 탄생시켰다. 한 마디로, “태초에 존재는 억압이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가벼운 풍자극의 장르적 특성과 낭만적 분위기, 환상적 세계관으로 일관한다. 달리 말해, 영화는 그 우아함과 화려함만으로도 관객을 충분히 압도한다. 하지만 자코 반 도마엘의 전작 <미스터 노바디>(2013)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이미지 속에 ‘나비효과’라는 알맹이를 숨겼듯, <이웃집에 신이 산다>도 “태초에 존재는 억압이었다”는 문장 하나에서부터 출발한다. 포장지만 화려한 줄 알고 열어봤더니, 속에 블랙홀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랄까.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의 억압을 폭로한다. 하지만 결코 ‘이러이러한 것은 네가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야’고 주장하지 않는다. 차라리 영화는 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인 디유(브누와 뽀엘부르드)에 반항하며 인간세계로 뛰쳐나온 에아(필리 그로인)로 인해―결정적으로는 어머니 여신(욜랜드 모로)에 의해―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을 뿐이다. 영화는 묻는다. 이래도 창세기 이후의 우리 존재가 억압이 아니냐고.

 

영화에서 중요한 건 억압과 해방의 대칭적 구조다. <이웃집의 신이 산다>에서 억압은 해방 이후에야 사후적으로 짐작된다. 자코 반 도마엘은 억압의 재현보다는, 해방 이후 제시되는 유토피아를 형상화하는데 공을 더 많이 들였을 것이다. 대안을 통해 역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작업이니까.

 

개인적으로 돋보인 대칭관계를 세 가지 정도로 추려봤다. 표면적인 차원에서부터 들어가 보자.

 

1. 아버지, 혹은 남성 VS. 어머니, 혹은 여성(+ 젠더의 바깥)

 

이 관계는 매우 명료하다. 에아의 집안에는 네 명이 산다. 신이자 아버지, 여신이자 어머니, 그리고 에아와, 그녀의 오빠이자 예수.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남자 대 여자 2:2의 구도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다, 폭력을 일삼는다. ‘아이스하키가 짱’이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믿은 오빠는 일찍이 인간세계에 내려가 12명(아이스하키 선수 수)의 사도를 모았지만 온갖 고생만 했다. 뒤늦게 후회하긴 했지만, 다 끝난 일이다. 어머니는 다혈질 아버지 곁에서 한없이 여리다. 말도 별로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압에 참지 못하고 인간세계로 나가기 전, 에아는 6명의 사도를 모아 세상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엄마가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오빠의 조언 때문이다. 12명에 6명을 더하면 18명, 야구 선수 수다.

 

아버지는 에아의 뒤를 쫓아 인간세계로 내려가지만, 딸 하나도 다스리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에아의 승리로 끝난다. 엄밀히 말하면 에아와 어머니의 승리다. 여성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그곳에는 아버지, 심지어는 오빠도 없다. 남성적 권위의 상징이 모조리 거세된 세상에 억압은 더 이상 없다. 모든 것은 자유롭다. 여성이 새로 쓴 역사herstory에서는 여성이란 개념마저 모호해진다. 남자가 임신을 하고, 여장남자 소년이 소녀와 뽀뽀를 한다. 태초에 그물로 포획된 경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2. 필연 혹은 이성 VS. 우연 혹은 감성

 

세상을 ‘리셋’한 건 놀랍게도 어머니였다. 생각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투명한 그녀는 가족이 다 떠나 텅 빈 집에서 청소를 시작한다.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흥겹게. 남편의 집무실에서 들어간 그녀는 청소기 전원을 연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컴퓨터의 전기코드를 뺐다 킨다. 이후 모니터에 뜬 화면을 보고 아무생각 없이 엔터를 누른다. 새로운 창세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아무런 이유도, 생각도 없이 세상은 ‘흥겹게’ 재창조되었다. 하지만 우연의 결과는 놀랍다. 그녀가 마구잡이로 택한 설정들은 세상을 낭만적이고 감성적으로 변화시킨다. 하늘은 꽃무늬로 수놓아지고, 중력이 사라져 사람들은 빌딩을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가벼운 손짓 하나로 식물이 움직인다. 누구 하나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영화에서 제시된 감성과 우연의 세계상은, 불가능하지만 전복적인 질문을 남긴다. “왜 우리는 필연과 이성, 과학과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어쩌면 이 모든 건 사과가 기어코 떨어지고, 달에 토끼가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로 “태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3. 언어 VS. 비(非)언어

 

새롭게 탄생한 세계에서 언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세상을 바꾼 어머니부터 말이 없다. 한 노숙자는 에아를 계속 따라다니며 신신약성서를 집필하는데, 책이라기엔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심지어 스펠링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버벅거린다. 세상이 리셋된 후, 노숙자는 드디어 ‘신신약성서’를 출간한다. 그런데 책 속에는 그나마 있던 몇 문장마저 없다. 오로지 그림뿐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세계, 감성과 우연의 세계에는 비(非)언어로 충만하다. ‘아버지-이성-언어’는 일종의 삼위일체다. 이들은 각각 하나이자 셋이며, 셋이자 하나이다. 언어는 그물의 현현이고, 그물은 태초이며, 이는 곧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어머니-감성-비언어’의 세계가 ‘클릭’ 하나로 탄생한다는 전개는 의미심장하다. <달콤한 인생>(김지운, 2005)의 마지막 보이스오버가 그렇듯, 불가능에 대한 꿈은 애잔함과 씁쓸함만을 남길 뿐인가.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