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파리의 한국남자> 불편함에 대한 변명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아내를 찾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도대체 왜 그는 그녀를 찾아 헤매는 걸까?

<파리의 한국남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부재는 곧 존재의 없음이므로, 다른 식으로 질문을 반복해볼 수 있다. 왜 그는 그녀와 사는가? 사랑해서? 계약한 관계니까?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감성, 이성, 도덕. ‘납득’할만한 대답들이 주를 이룬다. 소위 ‘대중적’인 영화들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고, 눈물 흘린다.

 

하지만 <파리의 한국남자>는 이 모든 ‘상식’적인 대답에서부터 자유롭다. 달리 말하면, 불편하고 불쾌하다.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고, 맥락의 끝마다 탈맥락적 과잉으로 치솟는다. 영화가 끝났는데 아무도 울지도, 웃지도, 심지어 욕을 하지도 않는다. 실소(失笑). 허탈한 웃음이 영화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 영화가 결코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의 불편함을 단순한 실패로만 치부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이 영화(의 불편함)에 대한 짧은 변론을 남기려는 까닭이다.

 

<파리의 한국남자>가 불편한 것은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상식’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즉,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계’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관계는 무엇인가? 관계는 너와 내가 함께 맺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적이며, 쌍방 간의 완성된 어떤 ‘합의’다. 너와 나의 것이 곧 관계이며, 관계로서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이것이 상식으로서 관계다.

 

이제 관계에 대한 영화의 문맥을 살펴보자. 하지만 이는 관계에 대한 영화, 혹은 전수일 감독만의 유별난 해석이 아니다. “섹스는 없다.” 자크 라캉의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섹스’를 풀어 써볼 필요가 있다. “성관계는 없다.” 여기서 방점은 관계에 찍혀야 한다. 그러므로 다시. “성‘관계’는 없다.”

 

라캉에 따르면, 섹스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다. 섹스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각각의 환상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자위와 다르지 않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성적 매력,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남자의 입장에서) 가슴, 엉덩이, S라인 등이다. 육체의 ‘일부’다. 결코 여성의 육체 전체가 아니다. 사실 누군가의 벗은 몸을 ‘그대로’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른바 ‘부분대상objet a’. 우리는 대상 전체를 욕망하는 것 같지만, 대상 전체를 압도하는 부분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욕망은 곧 대상에 대한 판타지인 것이다.

 

논의를 확장해보자. 관계란 무엇인가? 관계는, 상식과 달리 너와 나의 어긋남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어린왕자>에서 여우의 말은 그럴듯한 낭만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냉철한 탐구다. 우리는 ‘길들임’과 ‘길들여짐’의 관계다. 즉,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하지만 이는 중층적이다. 너와 나 각각에 별개로 성립한다. 나의 입장에서 나는 너를 지배하지만, 너의 입장에서 나는 너에게 지배당한다. 나는 너의 지배자고 너는 나의 지배자다.

 

그러니까 관계는 곧 판타지인 것이다. 우리는 판타지다. 우리란 없다. 우리라고 여겨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말했든 너와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너의 것과 나의 것의 어긋남이다. 너의 판타지와 나의 판타지의 충돌이다. 나의 우리와 너의 우리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상호(조재현)는 거지꼴을 하고서 왜 그렇게도 연화(팽지인)를 찾아 헤매는가? 상호에게 아내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영화의 답은 탈맥락적 현상, 그리고 판타지에 있다. 상호는 연화를 찾아다니다 만난 창(미콴락)과 매춘을 시도한다. 그 지점에서 상호의 의도는 의심받는다. 그녀는 아내를 찾기 위해 매춘부 사이를 전전하는가, 아니면 매춘부 사이를 전전하기 위해 아내를 찾아 헤매는가?

 

다음은 또 어떤가.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퀀스. 상호가 환락가를 지난다. 술집 마담쯤 되는 여자가 여러 나라의 여자들이 있다며 상호를 유혹한다. (프레임 밖에 있지만 짐작건대) 꿈쩍 않고 길을 가던 상호는 “한국 여자”도 있다는 말에 발길을 돌린다. 그는 매춘의 대가로 연화와의 결혼반지를 건넨다. 먼저 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상호에게 한 여성이 들어와 관계를 맺는다. 카메라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중에, 그녀는 반지를 그대로 상호에게 돌려준다. 이 시퀀스는 상호의 판타지이며, 동시에 상호에게 매춘행위를 했던 여자가 연화였다고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매춘부로서 연화, 매춘 행위로서 사랑에 대한 상호의 판타지야 말로 연화와 상호의 관계이며, 상호에게 연화가 의미하는 바이며, 상호가 미친 듯이 연화를 찾아다니는 이유라고 말이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