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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에 대하여

[서평]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삶을 지속할 뿐이다. 당신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당신의 아픔의 저 기저까지 닿을 수 있다는 오만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말이고, 함께 가자는 말은 그래서 더욱 힘든 말이다.




사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대한 리뷰들은 이미 많다. 대개의 경우들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열악한 시간강사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며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헬조선에서의 생존기'로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카드뉴스 형태 등으로 클립화 된 책의 주목받았던 중요한 부분들은 최저시급도 안 돼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대학원 조교의 열악한 삶, 맥도날드 알바도 보장해주는 국민건강보험조차 영위할 수 없는 환경, 소소한 술값조차 감당할 수 없는 사회에서의 인격적 소외 등이었다. 책을 출간한 지 얼마 안 돼서 스스로 작가라고 밝힌 '309호1201호' 김민섭 씨가 자신의 모교이자 삶의 현장이었던 연세대 원주캠퍼스를 떠난 것은 그러한 비극의 완성 정도로 여겨졌다. 2015년의 마지막에서 심심찮게 읽을 수 있었던 그의 인터뷰는 그러한 현실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담론들은 결국 모든 사회적 이슈들이 밟았던 전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쿠르디 이전의 시리아 난민에 대해 알지 못하며, 한비야 이전의 아프리카의 고통 받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Occupy Wall Street 이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의 폭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조두순 사건 이전의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해 잊고 살았다. 그리하여 용산참사의 비극은 그 형태를 바꿔 Takeout drawing에서 반복되건만, 우리 모두는 그 기억을 잊은 채 싸이의 편에서 "불법 세입자들의 만행"을 "엄격, 진지, 근엄"하게 꾸짖을 뿐이다. 모든 아픔들은 그렇게 잊혀졌고 다시 비극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망각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이전에도 열악한 처우에 못 이겨 자살한 시간 강사들의 뉴스가 있었고, 아직도 학교 캠퍼스 어딘가 에서는 추모하는 향불의 향이 일 년에 한 번 씩 흩날리지만 그 또한 과거의 일일 뿐이다. 지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 계속 고민할 수 있을까. 다시 시간 강사들의 삶에 대해서, 최저 임금조차 보장 받지 못한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할 자신이 없다. 우리는 세월의 기억조차 과거의 망령으로 지긋지긋한 감성팔이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을 읽으면서 스스로 의미를 찾았던 부분은 언론을 통해 부풀러지고 과장된 "노오력이 부족한 헬조선" 이야기 이면에 놓여있던 작가 본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난하고 고통스럽지만 의미가 없지 않은 '시간'들. 모순되고 왜곡된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순수성을 잃지 않은 행복했던 공부의 시간들. 섬세함과 감수성으로 묘사되는 사회 속 인간으로서의 소소한 삶과 아름다움. 빛을 바라지 못했던 인간 인문학자로서의 삶과 그 담담함이 오히려 텍스트를 읽는 과정에서 더욱 의미를 발했던 것 같다. 나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은 삶이라는 독백. 책의 발간 후, 그렇게 계속 있고 싶었던 학교를 떠나야 하는 그 모순이 더 비극적인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작가인 309동1201호는 어쩌면 너무 섬세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의 말에 이의제기를 했던 수많은 다른 시간강사들의 비공감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책에 직접 올린, '작가 같은 사람이면 사회 어느 곳에서도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대학강사 K의 평도, 블로그에서 나도 시간 강사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란 리뷰를 볼 수 있던 것도 그의 이야기가 어쩌면 일반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의 책이 생존을 위해 애쓰는 이들의 삶을 부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반화 할 수 없는 얘기에, 우리 모두가 너무 과잉으로 분노한다고 말한다면 너희들이 지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삶을 영위하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마저 구조적 모순에 순응하는 문제적 개인으로 치부하는 것 또한 폭력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어쩌면 굉장히 미시적일지도 모를 그의 이야기가, 그렇기에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가져온 이유이자 책의 의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은 그의 이야기가, 결국 외마디 단말마로 그칠지라도 주목받을 수 있는 건, 그것이 바로 그 '상황'에서 '살아있었던' '단 한 마리'의 카나리아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았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았다는 이야기였기에 말이다. 이것의 바로 나의 '시간'이었기에, 그 시간의 자리에 이제 모두의 이야기가 투영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타인의 고통에 오롯이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의 나의 '시간'이 담긴 이야기가 되는 그 지점에서는,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로 변주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기반 텍스트로서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정체성은, 다시 수많은 이야기들이 파생될 수 있는 열쇠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나는 두산 인프라코어의 회사원이다>, <나는 열정페이 인턴이다>와 같은 수많은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할 때만 온 힘을 다해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의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기엔 이미 모두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더 적나라한 현실의 <송곳>을 대신해 사람들이 <미생>에 열광했던 건 그래도 아직은 무너질 수 없다는 사람들의 무의식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어쩌면 드라마 <송곳>이 갔던 길을 다시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가 볼 때 함께 분노하고, 힘들어하겠지만 현실의 삶까지 그 아픔을 함께 밀고 갈 힘은 아직은 없다. 그걸 비겁하다고만 말하기엔 모두가 너무나 아프다. 그러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그 문체의 담담함을 통해서, 같이 뛰자고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지방대 시간강사'란 칸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쓸 것을 권한다. 그렇게 너만의 고통이 나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순간, 우리의 '시간'은 시작된다.


by. 9


* 사진 출처 : 도서출판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