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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만세전>

<만세전>은 기본적으로 (남성) 지식인 이인화의 서사이다. 그러므로 남성 서사라 불러도 무리는 없겠다. 그런데 그의 행로 중에는 계속해서 다양한 여성들이, 그것도 간헐적으로 반복되며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귀향’하는, 그리고 다시 ‘탈향’하는 과정에 있는 이인화의 심리적 불안, 모호함, 혼란 등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의미를 띤 채 형상화되고 있는 여성들을 꼽아보자면 이인화의 아내, 정자, 을라, 그리고 ‘큰 형님의 둘째 아내’ 정도가 되겠다. 이들은 다시 이인화의 심리적 불안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반봉건성이 여전히 만연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소위 지식인으로서 조국을 떠나 마주한 근대적 일본(에서 살아가는 자아)’라는 두 축을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전자는 아내와 큰 형님의 둘째 부인, 후자는 정자와 을라다.   

 

먼저, 아내는 어떤 존재인가? 아내는 서사의 출발점이자 종결점이다. 하지만 결코 서사의 중심이 되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아내는 결코 서사에서 배제될 수 없다. 그녀는 어쩌면, 서사를 벗어난, 서사를 둘러싼 모든 것일지 모른다.

 

이는 이인화의 심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인화의 심리에서 아내의 병환, 그리고 잠재적인 죽음은 압도적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좀처럼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하려고 애를 쓰며 침묵을 말)한다. 불현듯 늘어놓는 아내에 대한 ‘무’정함. 소식을 접한 첫 날 계속해서 주저하며 내놓는 변명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나에게는 무리가 따른다. 조선으로, 서울로 가는 행로에서 보이는 불안증적인, 분열증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돌발적인, 계속해서 귀양을 지연시키는 행위들은 역설적이게도 뭔가에 쫓기는 듯 조급해 보인다.

 

이건 차라리 정신병에 가깝다. 계속해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무관심한 발언은 마치 몽롱한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튀어나온다. 여기서 아내의 병환/죽음이 이인화의 심리에서 (기묘하게) 배제되는 과정에는 인위적인, 강박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이인화에게 아내의 존재는 벗어나고 싶지만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벗어난 듯하면, 언제고 유령처럼 ‘무관심/무정함(혹은 그 대상)’으로 위장하여 도착된 그의 아내가 나타난다. 이러한 아내의 모순적이고도 불안한 존재, 위치는 반봉건적 조선식민지 현실에 대한 이인화의 이중적 위치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전에 잠시, 큰 형님의 둘째 아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녀는 아내가 이인화의 심리에서 차지하는 것만큼 딱히 어떤 불안이나 동요를 야기하는 존재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그녀가 이인화의 심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는 명백하다. ‘고작해야 열아홉 살쯤’(59)인 그녀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큰 형님의 집으로 시집을 오게 된건 바로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인화에게는 터무니없을 뿐이다. ‘사람의 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63)하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아내와 큰 형님의 둘째 아내는 모두 ‘식민지 조선의 반봉건적 현실’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적 유산인 조혼으로 맞이한 아내, 마찬가지로 봉건적인 관습에 얽매여, 그렇게 ‘무서운 관념’에 휘둘려 별로 원치 않았을, 불가피한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큰 형님의 둘째 아내. 그리고 그러한 큰 형님 등의 사고방식.

 

그런데 이인화(염상섭)은 이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건 자명하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분노, 점차 뚜렷해져가는 의식. 어쨌든 비루할지라도 조선은 나의 나라가 아닌가, 하는 인식도 분명 있다. 다시, 아내에 대한 정신병적인(도착적인) 무관심을 떠올려보자. 이인화에게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는 조선 그 자체가 아닐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하지만 언제고 벗어나고 싶은 그런 불가피한 대상. 사실 이렇게 되면 이인화는 무모할지라도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도대체 조선이란 무엇일까?

 

상대적으로 정자와 을라는 명확하다. 앞의 두 여성과는 다르게, 일단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봉건적인 사회제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특히, 이인화와 아내의 조혼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둘이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여기서 둘은 차이를 보인다. 정자는 확실히 을라에 비해 훨씬 독립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을라는 병화와의 관계에서나 이인화와의 관계에서도 보여지듯, 언제고 다른 이(남성)에게 의지할 듯하지만, 그에 비해 정자는 그런 의존도가 덜 한 것 같다. 물론, 이인화에 대해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대화나 편지 등에서)가 있긴 하지만, 후에 이인화가 그녀를 찾아가지 않고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그녀의 미래(대학생활과 그 이후)가 불안으로 점철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대화’가 많다. 물론 앞의 두 여성 인물의 비중이라든지, 아내의 병환 상태 등을 고려해보면 딱히 ‘대화’의 분량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나, 적지만 뚜렷이 드러나는 그녀들의 특성을 보건대 확실히 다른 조건(분량, 건강)이었다고 하더라도 대화의 분량이 딱히 늘진 않을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자기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더구나 문학, 혹은 음악이라는 재주까지 갖고 있는 정자와 을라는, 그들이 생활하는 장소를 고려해본다면, 한마디로 ‘근대화한 일본 (의 여성)’을 보여준다.

 

이인화(염상섭)은 그녀들에게 무한한 호감을 갖고, 긍정적인(혹은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그네들에 대한 이인화의 심리가 또 오묘하다. 정자에게 ‘아까운 계집애다라고 생각은 하였어도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정열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22) 기껏 찾아가놓고서는 ‘나는 을라를 위해 이틀씩 묵기는 싫었다.’(28)라고 하는 것 등.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여기서도 다분히 이중적인 모습이 보인다.

 

스스로 ‘경계를 하는 자기’(22)라고 표현하였듯이, 그 둘과의 관계를 원하면서도 어떤 불안증에 다시 멀어지고야마는, 이런 모순적인 심리 상태가 계속된다. 이러한 심리는 위에서 분석한 아내에 대한 것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으므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어쨌든, 이 두 여성은 이인화에게 있어 조선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스스로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억압하는 근대화된 일제를 ‘상징’한다(혹은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이인화의 불안증을 생각해보면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볼 수 있다. 도대체 이인화에게 일본이란 무엇인가?

 

종합해보면, 네 명의 여성 인물들은 ‘근대화된 일본 제국’에서 ‘반봉건적 식민지 조선’로 진행하는 서사에서 각 측을 표상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남성 지식인으로서의 이인화가 있다. 여성들은 ‘장소’의 표상으로서 그 자리에서 -움직임이 있다면-진동하고 있을 뿐인데, 이인화는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며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움직인다.

 

글을 마치기 전에 잠시. 노파심이지만, 질문에 답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이인화를 강박증에 걸린 정신분열증자 취급을 한 것 같다. 변명을 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남성) 지식인들이 위치하고 있던 자리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심지어 염상섭도) 이인화가 자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by 벼

 

*사진출처: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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