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던컨 폴리 <아담의 오류>

2014년도 1학기, 그러니까 3학년 2학기부터 복수전공으로 경제학을 듣기 시작했다. 굳이 경제학을 선택한 건 무엇보다 본전공인 국문과 학위만을 가지고는 취업이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문학적인) 공부를 하는 중 여러 번 사회·경제적인 사유에 맞닥뜨릴 때마다 느꼈던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경제학을 공부하겠다, 계획했던 건 군대에서 갓 병장을 달았을 때, 그러니까 2013년 초였다. 경제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던 친구에게 텍스트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공부를 시작하는 거라면”이라고 운을 뗀 뒤, 난생처음 듣는 작가의 생소한 제목의 텍스트를 언급했다. 던컨 폴리, 『아담의 오류』.

 

『아담의 오류』는 단순히 말하면 경제학사를 다룬다. 경제학사라면 이전에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를 통해 어렴풋이 접했던 터였다. 비교적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학적 이론과 개념들을 명쾌하게 에둘러 가는 『세속의 철학자들』 같은 경우는 큰 어려움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오류』를 읽으려는 순간, 계속해서 등장하는 생경하고 난해한 경제학적인 개념들에 나는 쉽사리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었다. 결국, 서론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책을 덮어버렸다. 그의 책은 소위 ‘경제학적 문맹’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단순한 교양적 지식의 수준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텍스트였고, 그 충격의 여파로 인하여 한동안 경제학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이후 나는 다시 『아담의 오류』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적잖을 시간을 경제학 공부에 투자한 뒤였다. 일종의 복수심과 부푼 기대를 안은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시 읽었다. 물론 아직 경제학적 지식이 원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폴리가 말하는 모든 개념을 속속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고, 경제학적 문맹을 퇴치할 가능성과, 동시에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아담의 오류’가 무엇이었는가를 언급하진 않을 것이다.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어보길. 다만 여기선 책을 관통하는 폴리의 시선과 그에 대한 소견을 적어보려고 한다. 폴리는  『아담의 오류』에서 몇 백 년에 걸친 경제사를 다루면서도 끝까지 아담 스미스를 놓지 않는다. 과장이 아니라 이 책은 아담 스미스를 위한, 아담 스미스에 의한, 아담 스미스의 (불쾌한)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폴리에 따르면, 아담 스미스 이후 모든 경제학자는 아담 스미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저 아담 스미스의 오류를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경제학파도, 한계주의자들이나 베블런도, 케인스주의자나 신자유주의, 슘페터 등도. 심지어 마르크스까지 아담의 오류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그만큼 아담의 오류가 현실적이며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리가 아담 스미스 자체를 논하는 데 할애했던 첫 장은 상대적으로 분량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른 모든 장들(심지어 마르크스에 대한 장까지도)을 통틀어 가장 엄밀하고 엄중하며 날카롭다. 다른 어느 장들보다 1장은 내용을 축약하기가 어려웠는데, 이것도 그 때문이 아니지 싶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아담 스미스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아담 스미스가 되고자 고군분투했다. 여기서 역설적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그는 아담 스미스 외부(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비판이 그러했듯이 내부적 균열)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유컨대 자살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자살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는 스미스의 오류를 이해하기 위하여 스미스가 되고자 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는 엄밀하게 자신(스미스)의 오류를 완성해낸다.  

 

그 이후의 논의들은, 좀 과장하자면 1장의 곁가지들에 불과하다. 심지어 마르크스를 다룬 장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비록 마르크스주의자이고, 그래서 마르크스에 할애한 장이 가장 많으며 또 매우 엄밀하고 섬세하지만 (최소한 이 텍스트에서는) 아담 스미스의 막대한 비중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과 배치되거나 모순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애초에 마르크스도 고전파 경제학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고전파들은 마르크스가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스미스나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형이상학’이라고 물리치’는 것을 효용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이런 식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는 아담 스미스를 공공연히 추종하는 그의 후학들(고전학파, 그리고 최근에는 새고전학파)보다 훨씬 아담 스미스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5장까지 마르크스를 포함한 다양한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논의를 끝마친 뒤, 다시 아담 스미스로 돌아간다는 것에서도 폴리의 스미스에 대한 천착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다 그는 결론에서마저 스미스로 회귀한다. 폴리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드러나는 다종다양한 모순들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현대 경제학의 기원인 스미스의 오류에서부터 찾아야 하며, 다른 의미에서 거기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폴리가 제시하는 의견 혹은 교훈은 마지막 장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무조건적인 글로벌(혹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수용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경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사다리 걷어차기』로 유명한 장하준 교수의 핵심적 주장, 즉 무조건적인 개방은 선진국들이 자기들이 이미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 버림으로써, 후진국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이 비단 현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기 독일의 역사학파들의 주장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리스트는 당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자유방임적 경제 체제를 경제 후진국이었던 독일에 적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역사발전단계설에 따라, 당시 독일의 경제 환경은 영국이 도달했던 ‘농공상업 단계’보다 한 단계 이전인 ‘농공업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앞서 있는 영국식 자본주의를 무조건 따르면 안 되고, 각 국가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다른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리스트는 주장했다.

 

이런 논의들은 폴리의 자본주의의 유일한 경로, 왕도란 없다는 교훈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미셸 알베르가 말했던 ‘경로 의존성path-dependence’ 개념과도 같다. 현재 드러나는 다양한 자본주의의 형태들은 모두 각각의 경로, 즉 역사적 경과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일한 자본주의란 없고 다양한 자본주의‘들’만이 존재하고, 결국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자본주의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미국식 자본주의가 유일하고 최고의 자본주의일 수 없으며, 역사학파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영국식 자본주의가 유일하거나 최고의 자본주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자본주의적 형태들(예컨대, 미국, 북유럽,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등)을 무시하고 오직 한 가지의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정답이며, 모든 (특히 후진국들,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시점, 특히 여러 금융위기, 재정위기 등으로 고유한 기능마저도 위태로운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발버둥 쳐야 한다. 정말 답답하고도 숨이 턱 막히는 상황은 어떤 부조리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직면하고서도, ‘그래봤자 어쩔 수 있어?’라는 냉소적인 결론에 마주할 때가 아닐까. 그런 식으로 아담 스미스의 원리(=오류)는 몇 백 년을 유지해왔다.

 

애초에 냉소적 달관으로부터 시작했던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은 끊임없이 회의감을 억누르고, 반발심을 억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속병을 앓고 있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소화제를 먹으면서 억지로 음식물을 삼키고 소화해 왔다고 치자. 하지만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속은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이 언제까지 (겉으로) 숨겨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의 내부는, 자본주의의 내부는 서서히 기능부전과 불량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죽음은 순식간에 우리를 덮칠 것이다. 아니, 이미 죽음의 증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스미스의 교묘한 기만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by 벼

 

* 사진출처:
알라딘
https://i.ytimg.com/vi/xpD2wDeVlp4/maxresdefaul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