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공감이 되지 않아서 별로였어.”만큼 난감한 평가도 없을 것이다. 그런 평가가 잘못 됐다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말고를 나누는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냐는 말이다.
누군가는 비행사의 삶을 다룬 영화를 보면서, ‘나는 비행을 해보지 않았으니, 저 이야기에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아.’ 영화티켓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쉴 수 있다. 반면에, 누군가는 재난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오줌 마려워 죽을 뻔했던 기억이 나네.’ 창백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감을 얻는 영화=보편적 주제를 담은 영화’ 혹은 ‘공감을 얻지 못한 영화=특수하한 주제를 담은 영화’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어머니>(난니 모레티, 2015)에서 어머니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 숙고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2012)의 또 다른 어머니로서 에바(틸다 스윈튼)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또한 나는 <노스탤지어>(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96)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예술의 위대함,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예술을 창조하는 인간의 헌신에 눈물 훔쳤다. 하지만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뱅크시, 2011)가 다소간 자학적으로 예술에 대한 회의와 냉소를 내비칠 때 역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에 대해서라면 다른 의미에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영화가 보편과 특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분명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골리(레일라 하타미)와 파하드(알리 모사파)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둘은 여느 로맨스 영화의 전개가 그렇듯, 점차 가까워진다. 물론,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에서는 ‘기억’이라는 소재를 도입하여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구성하긴 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가까워지는 건 골리뿐이다. 모사파는 애초에 골리의 관심을 갈구한다.
하지만 영화는 또한 로맨스 영화의 일반적인 문법을 거부하기도 한다. 특히 영화의 톤앤매너는 갈팡질팡하여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분위기는 진지함과 심각함에서 가벼움과 유쾌함을 넘나들며, 무엇보다 모사파라는 인물은 의문만을 남긴다. 파하드가 내게 남긴 인상이라곤 섬뜩함, 스토커, 몽상가 정도가 전부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골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의뭉스러워진다. 물론 이런 캐릭터로서 모사파의 존재가 혐오스럽거나 거북스러운 건 아니다. 파하드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도무지 골리와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다가가는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는 이율배반적이다. 비유컨대 “살인을 하지 말라!”는 5계를 살인자가 외치고 있는 상황이랄까. “살인을 하지 말라”는 계명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살인자에 대한 연민을 품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살인을 하지 말라”며 피를 씻어내는 살인자를 위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는 파하드에서 홍상수의 전형적인 남성 캐릭터를 보았고, 영상에서는 타르코프스키를 보았다. 둘은 위대하지만, 결코 하나일 순 없다.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의 감독 사피 야즈다니안은 이란의 저명한 평론가이며, 이 작품은 그의 장편데뷔작이다. 과유불급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