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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더 랍스터>, 사랑은 신기루인건가요?

*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기루라는 것이 있다. 그럴듯한 개념 하나 소개하는 듯이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 중 신기루에 대해 모르거나, 신기루라는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다. 오아시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여행자의 절규는 어릴 적 우리에게 철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했으니까.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신기루는 가짜라기 보단 왜곡에 가깝다. 신기루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뿅! 하고 무엇이 생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신기루에 대한 정의는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신기루란 목이 너무 말라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는 여행자의 ‘망상’이 아니라, 어딘가에 무엇인가 있지만 불안정한 대기층에 의해 왜곡된 빛을 감각하는 여행자의 ‘착시’다. 망상과 착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전자가 철저히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완벽히 맥락에 의한 것이다. 후자에 따르면 그 누구라도 (불안정한 대기층이라는) 특정 맥락 속에서라면 신기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신기루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왜곡과 맥락이다. 왜곡은 또한 일종의 탈맥락적 현상이므로 다음과 같이 표현해볼 수 있다. ‘신기루는 탈맥락적이면서도 맥락적인 현상이다.’ 좀 풀어서 말해볼까. 신기루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있다는 점에서 맥락(혹은 합리성)을 벗어난다. 하지만 신기루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라는 점에서 맥락(합리)적이다. 이런 역설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기루 자체가 역설이라는 걸 잊지 말자.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곧 신기루다. 여러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이 어려운 말들을 써가면서 사랑을 논해왔지만, 결국 대부분 ‘사랑은 신기루’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사랑은 대상을 탈맥락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했던 슬라보예 지젝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건다는 초현실주의 소설의 독백은 사랑의 탈맥락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신기루로서의 사랑을 반쯤 포착한 셈. 그렇다면 탈맥락적인 사랑의 성취 이후 지속적인 선언(“난 널 사랑해”)의 노력을 강조했던 알랭 바디우 같은 경우는, 앞선 반쪽짜리 정의에 ‘맥락적’인 성격을 더함으로써 사랑의 성격을 온전히 정의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영화의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는 내가 본 중 최초로, 또한 유일하게 신기루로서 사랑은 온전하게 다룬 영화다. 사랑의 맥락적 측면을 다룬 영화들은 넘쳐난다. 헐리우드, 또는 그런 풍의 로맨스 영화 하나만 찾아보라.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의 낭만적 분위기를 저격하는 워킹 타이틀의 영화들도 마찬가지. 사랑의 탈맥락적 측면을 다룬 영화들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선 다른 말 할 것 없이 우디 앨런의 영화를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리라. 이 둘에서 더 나아가 <더 랍스터>는 사랑의 맥락적, 탈맥락적 측면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사랑은 신기루’라는 명제를 보여준 영화다.

 


1. 영화의 구조 - 전반부와 후반부

 

영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옆구리 시린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곳은 커플을 장려하며 솔로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버림받아 솔로가 된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솔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커플 메이킹 호텔로 간다. 그곳에는 규칙이 있는데, 45일 동안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랍스터는 ‘혹시 동물이 된다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대한 데이비드의 답이다. 일찍이 호텔에 왔던 그의 형은 개가 되었다.

 

다른 한 편에는 ‘외톨이’ 무리가 있다. 그들은 일종의 반사회적 레지스탕스로, 숲속에서 생활하며 조직원들 간의 관계를 철저히 단속한다.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남녀 간에 썸이라도 생길 경우는 무지막지한 처벌을 내린다. 그러므로 ‘외톨이’들은 어떤 생각, 행위 등의 공유를 꿈꿀 수 없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CD플레이어다. 그들은 음악도 같이 듣지 않고 이어폰으로 혼자 듣는다. 파티를 벌인답시고 한 손에 CD플레이어를 들고, 일렉트로닉 음악을 듣는 개인들의 흥겨운 춤사위들은 차라리 공포다.

 

<더 랍스터>는 데이비드의 행로를 좇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 데이비드는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커플을 찾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다 어떤 사건에 휘말려 호텔에서 도망친 데이비드는 ‘외톨이’에 합류하게 된다. 후반부에서는 ‘외톨이’에서 생활하는 데이비드를 다룬다.

 

 

2. 전반부 - 사랑 없는 사랑을 원하세요?

 

우선 전반부부터 살펴보자.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는 사랑, 커플, 로맨스 등이 난무하지만 정작 거기에 진짜 사랑은 없다. 달리 말해 신기루로서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의 사랑은 신기루라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치 기계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솔로라는 부품들은 45일이라는 시간 안에 이성을 찾고, 총 4주간의 동거를 거친 뒤 커플로 ‘완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동일하고 유일한 목표, 즉 커플이 되어야 하다는 목적 아래 모여 있다.

 

그러므로 커플 메이킹 호텔, 더 나아가 <더 랍스터>의 사회가 강조하는 사랑은 철저히 맥락적이고 이성적이다. 그곳에서 사랑은 마치 수학문제나 과학 시험이 그렇듯, 뻔하고 답이 정해져 있다. 거기서 결함은 곧 실패다. “행복하라!” “화목하라!”는 지상명령 앞에서 갈등, 싸움, 다툼이 들어갈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성공한 커플은 비유컨대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외톨이’들의 활동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커플들을 공격하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결코 물리적으로 둘을 떼놓는다든지, 죽인다든지 하지 않는다. 다만 커플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진짜 표정을 가리키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맥락적인 사랑이 용납하지 못하는 결함을 지시하는 것, 달리 말해 상대방에게 탈맥락적 상황을 보여주는 게 그들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외톨이’들은 한 부부의 침실에 침입하여 남자에게 총을 쥐어주고 여자를 쏘라고 한다. 남자는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지만, 총알이 들어있지 않아 발사되지 않는다. ‘외톨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간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외톨이’의 공격 이전에, 애초에 그런 관계가 가능할까? 우리는 모두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긴 하지만, 불쑥 가면 밖으로 참을 수 없는 응어리가 튀어나오곤 하지 않던가. 어떻게 그걸 가면 속에 완벽히 숨기고 사는 게 가능할까. 영화에선 그걸 감정을 지우는 방식으로 구현해냈다. 인간과 기계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보다 감정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랑 생산, 기계화가 확산되면서 노동자가 처음 잃은 것은 표정이었다. <모던 타임즈>(찰리 채플린, 1936)의 무표정한 노동자들을 보라. 마찬가지로 커플 메이킹 호텔의 인물들은 사랑-기계가 되기 위해 표정을, 감정을 잃는다. 데이비드가 결국 호텔에서 커플이 되지 못하고 호텔을 뛰쳐나오게 된 것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전반부에서 드러나는 사랑은 감정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두 번째 꼭지의 제목 “사랑 없는 사랑을 원하세요?”는 영화 속 대사나, 냉소적 뉘앙스의 표어가 아니다. ‘미틱Meetic'이라는 프랑스의 중매회사에서 실제로 내건 문구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진 않은 것 같다. 결코 커플 메이킹 호텔을 판타지적 공간으로만 치부해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3. 후반부 - 신기루로서의 사랑

 

감정 없는 사랑의 홍수 속에서 질식할 뻔했던 데이비드는 호텔을 떠나 ‘외톨이’ 무리에 합류한다. 말했다시피 그곳에서 사랑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거기서 데이비드가 근시 여인(레이첼 와이즈)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외적이고, 탈맥락적인 상황이다. 호텔에서의 사랑이 무결점이었다면, ‘외톨이’ 무리에서의 사랑은 그 자체로 결함인 셈이다.

 

여기까지라면 ‘외톨이’에서의 사랑은 우디 앨런 식의 사랑, 즉 탈맥락적인 사랑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여기에 맥락적인 차원을 덧붙임으로써 신기루로서의 사랑을 완성한다. 또한 이 지점은 <더 랍스터>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기도 한데, 반복과 변주라는 구조적 장치를 통해 사랑의 맥락적 차원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외톨이’ 무리에선 호텔에서의 상황이 반복되는 지점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호텔에서 절름발이 남자(벤 위쇼)는 코피 흘리는 여인(제시카 바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코를 때려 코피를 흘리는 일은 반복한다. 결국 둘은 코피를 흘린다는 공통점 때문에 커플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외톨이’ 무리에서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은 모두 근시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근시는 둘은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후반부에서는 호텔에서의 감정 없는 사랑마저 반복된다. ‘외톨이’들이 시내로 갈 때마다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은 부부 연기를 한다. 그들의 임무는 솔로라는 것을 눈치 못 채게 하는 것인데, 이는 호텔에서 커플에 대한 사람들의 강박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요소는 전후반부의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반부에서는 강박적이고 이성적이지만, 후반부에서는 우연적이고 감정적이다. 전반부에서 절름발이 남자는 코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코피를 흘리지만, 후반부에서 데이비드 커플은 하필 근시였을 따름이다. 전반부에서 사람들은 커플이 되기 위해,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고 슬픈 표정을 숨기지만, 후반부에서 데이비드 커플은 기꺼이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쓴다. 그들에게는 그 가면이야말로 실제 표정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에서 그대로 반복되지 않고 변주됨으로써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요소들은 강조되지 않으며, 차라리 지워 없어진다. 남는 것은 맥락뿐이다. <더 랍스터>가 세련된 것은 이렇게 가리키는 대상을 없애고, 가리키지 않는 대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영화의 열린 결말은 그 이상의 결말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하다. 데이비드 커플은 ‘외톨이’ 무리를 떠난다. 맥락이 또 다시 바뀌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바뀌었을 터. 신기루는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인가. 하지만 칼을 쥐고 거울 앞에 선 데이비드가 어떤 선택을 할진 아무도 알 수 없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