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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이 단편 「댈러웨이의 창」에 담았던 문제의식은 같은 작품이 실린 소설집 『나를 훔쳐라』(문학과지성사) 전반을 가로지른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어려운 용어가 거북스럽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여기 어두운 암실에는 사방이 하얀 천으로 둘러싸인 작은 상자가 있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촛불만이 유일하게 빛을 밝힌다. 상자 안에는 미지의 물체가 들어 있는데, 우리는 하얀 천에 맺힌 그림자를 통해서 그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형태는 대략적으로 보건대 토끼의 모양이다. 자, 그렇다면 질문. 상자를 둘러싼 천은 토끼라고 추측되는 대상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가리는가?

 

대답 하나, 보여준다. 정말? 우리는 그저 토끼처럼 보일 뿐인 그림자를 볼 뿐이다. 정말 그 안에 토끼가 들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단지 토끼 귀처럼 솟아오른 두 형상 때문에? 대답 둘, 가린다. 찬찬히 생각해보자. 사방은 어둡고 우리가 그 박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곤, 촛불에 비친 그림자뿐이다.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나마 천에 비친 그림자 덕에 제한적이나마 대상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이러한 딜레마는 곧 재현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당연히 영화도 마찬가지. 이를테면 영화, 혹은 텔레비전을 통해 재현되는 현실은 현실을 가리는가, 아니면 멀리 떨어진 현실을 그나마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인가.

 

터키의 폭탄 테러, 쿠바의 홍수, 끝없이 이어지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아득히 먼 현실들이 스크린 혹은 브라운관을 ‘거쳐’ 엄습할 때, 우리가 감각하는 게 결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예컨대,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영화들(<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이 그렇듯, 인도네시아의 비인도적 학살의 기억과 현재에 대한 기록을 한국을 거의 벗어난 적 없는 내가 경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에도 틀림없다.

 

 

1.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브라질 영화 감독 월터 살레스가 먼 타국에서 또 다른 영화감독 지아장커의 삶, 사상, 더 나아가 그의 영화를 담은 영화다. 말하자면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영화에 대한 영화, 즉 메타 영화인 셈이다. 그러므로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 영화는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가?’를 끈질기게 물을 수밖에 없다.

 

다소 자의적일 수 있지만,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월터 살레스는 지아장커와 함께 펜양을 거닌다. 거기서 그들은 지아장커의 과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인터뷰 씬에서 지아장커는 때로 혼자서, 때로 친구와 함께 과거를 추억한다. 후반부는 보다 지아장커의 사상, 영화관에 집중한다. 강연 장면을 삽입한 거라든지, 인터뷰 씬의 내용 등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히 구분되진 않는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는 지아장커를 좇는 씬과, 지아장커가 찍은 영화들을 교차편집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그 둘이 교차될 때 거리감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둘은 매우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어긋남만을 남긴 채 이어진다. 예컨대 영화의 첫 장면. 지아장커와 그의 친구 왕광위가 펜양의 거리를 걸으며 옛 이야기를 나눈다. 이 씬 뒤에 바로 이어지는 <소무>(지아장커, 1997)에서는 20여 년 전의 왕광위가 같은 공간을 거닐며 연기를 펼치고 있다.

 

다음은 또 어떤가. 지아장커의 뮤즈이자 아내 자오타오를 인터뷰하는 씬. 비행기에서 자오타오는 지아장커에게 무용수(자오타오는 원래 무용 강사였다.)의 고충을 얘기했다.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화려하지만, 무대 뒤에선 참으로 초라하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씬은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세계>(2004)다. 지아장커는 자오타오의 고백을 토대로 <세계>를 만들었다. 거기서 10여 년 전의 자오타오는 무용복을 입고 알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여담이지만 이런 점은 홍상수의 작업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교차편집이 그토록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까닭은 간단하다. 같은 공간, 같은 인물, 같은 소재, 노래를 중심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월터 살레스가 선택한 구조다. 현실과 영화 사이에 포개지는 요소들을 고르고 배치한 건 일차적으로 그의 공이다. 그런데 그 전에, 현실과 영화를 포개어놓은 지점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니까 월터 살레스가 발견하기 이전, 애초에 지아장커가 영화 속 현실을 끌어들였다는 사실 말이다.

 

 

2.

 

이제 영화의 구조는 한층 더 복잡해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월터 살레스가 지아장커를 찍고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다. 거기서 지아장커는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를 이야기한다. 또한 지아장커가 과거에 찍은 영화들이 있다. 종합하면 영화의 시제는 현재, 현재 기억하는 과거, 그리고 과거 그 자체로서 영화로 나뉜다.

 

문제는 두 번째 시제와 세 번째 시제다. 둘은 같은 시점을 다른 방식으로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이 방식의 차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른 방식의 두 시제(지아장커의 기억이 가닿는 과거와, 과거로서 영화가 재현하는 것)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영화는 현실을 전유 혹은 왜곡하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익숙한 물음. 이는 곧 ‘댈러웨이의 창’의 딜레마다. 두 번째 시제와 세 번째 시제 사이의 괴리는 곧 영화와 재현의 한계니까. 이는 동시대 중국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던 지아장커에게 가장 무거운 난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지아장커는 “현실을 바꾸는 것은 사회학자 역사학자의 몫이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보기에 이는 결코 비아냥이나 냉소가 아니다. 지아장커는 진지하게 영화감독으로서 영화의 한계를 절감했다. 어쩌면 현실과 영화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소원할 수도 있다. 영화는 현실을 털끝만큼도 못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아장커는 덧붙인다. 영화는 그저 현실을 묵묵히 담으면 그만이라고.

 

좌절하는 것과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것. 이는 지아장커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현실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중국에서 상영되지 못한 그에게 ‘댈러웨이의 창’ 운운하는 재현의 문제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다. 현실의 부조리, 모순 등을 영화에 담는 것을 철저히 검열하는 중국에선, 현실을 왜곡하든, 보여주든 영화 속에 현실을 담아내는 작업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 인터뷰 씬 중에 디지털 복제 시대에 더 이상 개봉 여부는 중요치 않다고 말하던 지아장커는 문득 자신의 영화 <플랫폼>(2000)에 얽힌 사연을 건넨다. <플랫폼> 역시 중국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어느 카페에서 개봉하지 못한 <플랫폼>을 틀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막상 가보니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통유리창이라 영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랴부랴 검은 천을 구해 가리고 나니 비가 새기 시작했어요. 정상적 영사로, 진짜 의자에 앉아, 불 꺼진 방에서 볼 수 없는 내 영화가 슬펐습니다. 극장에서 틀 수 없는 내 영화가 정말 슬펐습니다.”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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