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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BIFF 2015

<자객 섭은낭>, 혹은 허우샤오시엔이 무협판타지를 추모하는 방식

동시대 중국을 별다른 동요 없이 카메라에 담아왔던 지아장커는 기묘하게도 <천주정>(2013)에서 무협의 판타지를 끌어들였다. 과장된 배경음악, 인위적이고 능숙한 인물들의 몸짓과 포즈. 거기다 산탄총, 권총, 칼이라는 소재 등.

하지만 다소 생뚱맞은 무협영화적 요소들도 결국 동시대 중국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아장커에게 무협이란 일종의 거울이었다. 무협지적 낭만을 상실한 시대에 무협은 맥락을 잃고 부유할 수밖에 없다. 시대와 무협의 괴리, 그리고 불가능한 무협의 몸부림은 자연스레 무협이 불가능한 시대를 향한다. 그러니까 지아장커에게 무협은 단지 현실을 객관화시켜 반영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무협은 리얼리즘을 위한 판타지(적 수단)였다.

 

그리고 <빨간풍선>(2007)이후 8년 만에 허우샤오시엔이 무협으로 돌아왔다. 허우샤오시엔과 무협이라니. 지아장커와 무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낯설다. 리얼리즘에 대한 천착, 감성적 이미지들의 향연으로 ‘악명’ 높은 허우샤오시엔이 아닌가. 그런데 허우샤오시엔은 지아장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는 지아장커처럼 무협을 에두르지도 않는다. <자객 섭은낭>의 배경은 당나라다. 말하자면 허우샤우시엔은 무협이 가능한 시대의 무협, 말하자면 정말 본격 무협영화를 찍은 셈이다.

 

1. 수정주의 무협영화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자객 섭은낭>을 ‘수정주의 무협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영화라고 평했다. 이런 표현은 낯설지 않다. 1960년 중반부터 70년 초, 기존 서부극에 반기를 들고 선/악 구분의 모호함, 서부 개척자들의 포악성, 원주민들에 대한 연민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의 서부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서부극들은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범주로 한데 묶였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중적이다. 새로운 경향의 서부극이 탄생했다는 말은 곧 기존 서부극과의 작별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존 서부극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비록 수정주의라는 표현이 더해지긴 했지만, 남부극 혹은 동부극이 아니라 여전히 ‘서부극’이니까. 비유컨대 기존 서부극과 수정주의 서부극의 관계는 죽은 자와, 그를 추모하는 산 자의 관계다. 추모는 죽은 자를 죽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그를 잊지 않으려는 행위다. 미셸 푸코가 그의 동성연인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 구절처럼, 죽은 자를 추모함으로써 산 자의 공간은 죽은 자의 ‘부재로 가득’해진다.

 

"후반부로 갈수록 강해지고 사람이 많이 죽는 게 기존 무협영화의 특징이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도 그렇고요. 현실과 동떨어진 무술이에요. 그런 비현실적인 것을 차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허우샤오시엔의 이 말은 ‘수정주의 무협영화’라는 김지석의 표현이 결코 자의적 선언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허우샤오시엔은 기존 무협영화를 추모한다. 그는 무협영화를 거부하는 동시에, 애써 무협영화를 기억하려 한다. 지아장커와 허우샤오시엔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천주정>에서 지아장커는 결코 무협영화를 추모하지 않는다. 그에겐 무협영화를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없다. 그는 스키장 리조트에서 컵라면과 피자를 올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닮았다. 말하자면 지아장커에게 무협은 한물 간 어떤 것이며, 그를 기억하는 태도에는 최소한의 진정성 혹은 진심도 없다. 다만 그는 제삿날과 컵라면 사이의 괴리감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2. 리얼리즘 무협영화

 

위에서 지아장커가 무협을 ‘리얼리즘을 위한 판타지’ 쯤으로 받아들였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허우샤오시엔은 무협을 직시한다. 그에게 무협은 ‘리얼리즘을 위한 리얼리즘’이다. 쉽게 말해 그는 무협을 판타지가 아니라 리얼리즘으로 받아들인다. 붕붕 날아다니고, 키만 한 무기를 가볍게 휘두르고, 얇은 가지 위에 서 있는 등 무협 영화의 기존문법을 거부한다.

 

하지만 판타지가 없는 무협이 가능할까. 물론 <자객 섭은낭>에는 싸우는 씬이 상당힞 적은 편이지만, 어쨌든 5~6번 정도 나온다. 그런데 그마저도 대부분 롱쇼트다. 섭은낭(서기)이 호위무사들과 싸우는 모습을 아주 멀리서 담는다. 길쭉한 나무 뒤에서 그들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싸움을 비교적 가까이서 담는 씬들도 유별나다. 쇼트를 최소한으로 나누고, 카메라나 편집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부분도 거의 없다. 카메라는 대부분 인물들의 몸짓 그 자체를 잠자코 담을 뿐이다.

 

스스로 인터뷰에서 밝혔듯, 허우샤오시엔은 환상을 거둔 무협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식의 구성을 취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무협영화의 판타지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협영화를 추모하려는 허우샤오시엔은 그만의 방법으로 판타지를 끌어들인다.

 

3. 자객의 판타지, 자객의 리얼리즘

 

흑백으로 된 첫 씬 끝 섭은낭의 암살 장면.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던 섭은낭은 말을 타고 옆으로 지나가는 이를 향해 뛰어올라 단검을 휘두른다. 이 장면의 구성은 전형적인 무협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슬로모션, 빠르게 전환되는 쇼트, 얼굴을 화면 가득 담은 쇼트 등. 이런 구성은 이 씬이 사실상 유일하다.

 

판타지의 느낌이 강한 이 씬은 일종의 선전포고이자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무협영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처음이자 마지막 오마주. 이후 자신의 영화가 기존 무협영화의 문법에서 멀어지더라도, 결코 잊지는 않으리란 선언.

 

이후 전개는 위에서 살핀 그대로다. 기존 무협영화의 문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허우샤오시엔은 판타지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객을 다뤘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자객은 암살을 하는 자, 즉 남에게 들키지 않고 몰래, 신속히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존재다. 여기서 방점은 ‘남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데에 찍혀야 한다. 남이란 암살 대상이나 호위무사는 물론이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가능하리라. 자객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자를 어떻게 눈앞에 드러낼 것인가. 이건 차라리 참/거짓의 문제에 가깝다. 어쩌면 자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모습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더 이상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문제는 의미를 잃는다. 허우샤오시엔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든다. 말하자면 자객을 다루는 한, 판타지에 대한 거부와 리얼리즘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참이며, 역설적으로 이는 기존의 무협영화가 가닿지 못한 판타지의 궁극에 도달하는 방편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계안(장첸)의 호위무사가 등장하는 쇼트에서 그는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잠시 후 그는 사라진 그 모퉁이를 돌아 다급히 재등장한다. 화면 한 가운데에 선 호위무사는 오른편을 보며 분노 섞인 몸짓을 취한다. 하지만 이 롱쇼트에서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프레임 밖에 있다. 관객은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볼 수 없다. 그저 이후 섭은낭이 무사들 몇과 대결하는 쇼트를 통해서나마 짐작할 뿐이다.

 

거기다 섭은낭의 동선에는 어떤 순서, 조짐, 예감도 없다. 그는 마치 유비쿼터스처럼 그 어디에서든 존재한다. 예컨대 지붕 위에서 계안(장첸)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섭은낭은 홀연히 사라진다. 계안은 다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돌아가는데, 섭은낭이 또 다시 그곳에 ‘있’다. 돌아온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정말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안의 침실에 있었다는 듯, 그곳에 서‘있’다. 이렇게 동선의 과감한 생략은 섭은낭의 신비로움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므로 <자객 섭은낭> 쇼트의 상당수는 편재(遍在)하는 섭은낭의 시점쇼트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문법에서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녀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어떤 정해진 동선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움직이고 더 나아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거의 매번 등장하는 장애물, 혹은 가림막은 흥미롭다.

 

특히 계안의 침실 쇼트. 계안과 카메라 사이에서 얇은 실크(로 짜인 커튼?)가 끊임없이 나풀거린다. 실크로 인해 인물들의 모습은 흐릿해진다. 하지만 결코 인물들이 완전히 가려지는 법은 없다. 섭은낭의 시점쇼트로서 이러한 장면들은 암살의 대상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면 안 되는 자객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러므로 상당수 쇼트에서 인물과 카메라 사이에서 애매하게 존재하는 장애물들은 그 쇼트 자체가 섭은낭의 시선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쩌면 섭은낭을 담은 쇼트도 반대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섭은낭의 시선일지도.

 

허우샤오시엔이 무협영화를 추모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무협적 판타지를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판타지를 극대화하는 지독한 역설. 비트겐슈타인의 선언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라.”에서 침묵이 언어를 너머 보이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듯, <섭은낭>에서 형상화되지 않은 판타지는 형상화 되지 않은 모든 판타지를 가리킨다.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