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지극히 주관적인

지극히 주관적인 8월 개봉 기대작 세 편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하나 남은 반팔 티셔츠마저 벗길 요량인지 모르나, 쨍쨍 내리쬐는 햇빛이야 그렇다 치자. 그러나 도심 한복판에서 느끼는 습함 앞에선 무장해제다. 그럴 때만큼 프랜차이즈 카페의 강한 자본력만큼이나 빵빵한 에어컨 바람이 그리울 순 없다. 

평소에 걷는 걸 좋아해 대학로에서 광화문 사이의 공간은 눈감고 그려낼 수 있는 나로서도, 8월만큼은 예외가 될 듯싶다. 하지만 8월이라고 유별나게 새로울 건 없다. 우리는 수많은 8월들을 살아왔으니까. 지나가는 8월을 아쉬워할 때가 조만간일 테다. (그때 나는 9월의 개봉작들을 추리고 있겠지.) 나와 같은 마음을 품었던지, 시인 박준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박준, <여름에 부르는 이름>) 하나만 더 추가하자. 작년의 침울했던 여름 이후,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그랬듯, 올 해 여름에도 영화관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하녀의 일기> 8월 6일 개봉

 

영화에서 도발적인 하녀라는 소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뤄왔다. 물론 도발적인 하녀가 아니라, 섹슈얼한 하인과 귀족 딸의 로맨스를 다루긴 했지만, 최근에 <미스 줄리>(리브 울만, 2014)가 있었다. 거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김기영 감독이 1960년에 <하녀>를 찍어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마틴 스콜세지는 유명한 김기영 ‘빠돌이’다.) 50년 후,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대의 하녀는 전도연이 맡았다.

 

<어느 하녀의 일기>도 큰 줄기는 기존의 영화들과 같아 보인다. 파리 출신의 아름다운 셀레스틴(레아 세이두)가 한적한 마을의 하녀로 들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다만 눈에 띄는 건, 경쾌한 분위기다. 물론 예고편만으로 영화 전체를 판단할 순 없지만, 인물들의 익살맞은 표정이나 다소 과장된 몸짓과 표현들은 ‘시종’와 ‘성’을 다룬 도발적인 영화의 문법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이런 발칙한! 

 

<어느 하녀의 일기>는 옥타브 미라보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미 1964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원작에서 모든 인물의 캐릭터는 지나칠 정도로 괴팍하다. 개성과 정신병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할까. 발에 대한 페티시, 섹스에 대한 집착 등. 그러니까 제목이나 예고편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인공 셀레스틴뿐만 아니라 그녀 주위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도발적이고 발칙한 캐릭터다.

 

영화가 원작만큼 인물들을 독특하고 괴팍하게 그려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 이왕이면 좀 더 괴팍하고, 좀 더 도발적이길. ‘아니, 이렇게 발칙해도 되는거야?’라는 생각을 관객에게 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2. 레아 세이두

 

사실 무엇보다 <어느 하녀의 일기>가 기대되는 이유는 레아 세이두 때문이다. 비록 그녀를 본 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압델라티프 케시시, 2013)가 전부였지만, 레아 세이두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작품이었다. 한 치 앞도 관심 없는 듯한 몽환적인 눈빛, 그러나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열정적인 엠마를 훌륭히 소화해냈다.

 

더구나 이번에 맡은 셀레스틴이란 인물도 도발적이지만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 레아 세이두가 엠마나 셀레스틴 같은 역에 안성맞춤인 건 그녀의 쌍꺼풀이 그리도 깊기 때문은 아닐까. 계속 보고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는 얼굴. 그녀의 깊은 쌍꺼풀 속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8월 13일 개봉

 

삼포세대를 넘어서 오포세대란다. 거기다 이제는 팔포세대. 이쯤이면 이름 짓기와 갖다 붙이기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신조어들의 난립이 최소한 그만큼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렇게 무엇인가를 계속 포기해나가는 사람들, 그 시대를 다루는 영화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웬 토끼를 따라 토끼굴 속으로 떨어진다. ‘이상한 나라’의 시작이다. 그런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이정현)은 좀 다르다. 그녀는 현실세계로부터 이상한 세계로 떨어지거나, 빠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쭉 같은 세계에서 살아왔다. 열심히, 성실하게. 그러니까 성실한 나라란 수남에게 현실세계다. 그리고 ‘오포세대’인 우리 모두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성실한 나라를 사실적(이를테면 <산다>(박정범, 2014) 같이)으로 포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카메라나 편집, 캐릭터 뭐 하나 현실적이지 않다. 물리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과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판타지와 현실은 어떻게 중첩될 것이며, 그 효과는 어떠할까.

 

2. 이정현의 광기가 서글프다

 

이미 이정현은 미친 연기를 한 적이 있다. 그것도 데뷔작. 장선우의 <꽃잎>(1996)에서 그녀는 미친 소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다시 광기어린 표정으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흥미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음울한 시대를 뒤로하여 만들어졌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와, 2015년의 한국은 맞닿아있다. 그렇게 이정현의 돌아온 광기는 서럽다. 20여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광기는 잠잠해지기는커녕 한층 더 살벌하다. 96년의 소녀의 광기는 분명히 시대적 어두움 때문이었던 반면, 2015년 성인이 된 수남의 광기는 그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수남의 죄는 그저 ‘성실히’ 일했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선과 악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더 음울한 시대, 2015년에 이정현이 돌아왔다. 여전히 살벌한 눈빛을 하고서 말이다. 

 


<마리클 벨리에> 8월 27일 개봉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흔히 전자에는 ‘재미’가, 후자에는 ‘지루함’이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재미란 무엇인가. 왜 예술적 영화들은 보통 재미를 선사하지 못하는가.

 

내가 보기에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반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우선, 난해함이다. 한 마디로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는 영화들이 있다. 대부분 영화적 문법을 전복하거나,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거나, 지나친 추상과 형이상학을 가시화하는 경우다. 여기에 대해선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 흔히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 예술이 그렇듯, 이러한 영화도 그러한 존재, 시도 자체에 의의를 둘 따름이다.

 

또한, 시종일관 진지하고, 별다른 극적 장치가 없으며, 비관적인 것도 예술적인 영화의 한 측면이다. 프랑스 영화사의 꽃, ‘누벨바그’의 영화들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난해한 예술영화에 비해, 이런 영화들 중에는 대중성을 획득한 영화가 왕왕 있다. 대표적으로 <모던 타임즈>(찰리 채플린, 1936)가 있다. 사실 내용만 놓고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한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는 나날을 다뤘을 뿐. 그러나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바로 ‘유머’와 ‘재치’ 때문. 분위기 하나만 변해도 대중은 반응한다.

 

<미라클 벨리에>는 예술적 영화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다. 그런 프랑스에서 감독 에릭 라티고의 연출력에 대한 호평이 이어졌는데, 거기다 <미라클 벨리에>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기까지 했다. 짐작건대 <미라클 벨리에>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영화지 싶다. 만약 그렇다면, 그 비결은 TV 시리즈물을 재치 있게 연출했고, 코미디 영화로 데뷔했던 에릭 라티고의 전력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유쾌함이라는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대중은 반응하는 것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 포인트)

 

1. 소리와 침묵의 긴장관계를 잘 구현해냈는가

 

<미라클 벨리에>의 주인공 폴라(루안 에머라)는 가족 중 유일하게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다. 말하자면 폴라는 집 안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집에서 소리란 무의미하며, 소리 밖의 모든 것, 이를테면 손짓(수화), 표정만이 중요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폴라가 노래에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 집안에서 침묵으로 일관했을 그녀에게 노래란 어떤 의미일까. 거기다 그녀의 노랫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한 가족들에게, 노래를 위해 집을 떠난다는 그녀의 결심은 얼마나 큰 두려움일까.

 

이렇듯 영화는 설정 자체로도 흥미롭다. 침묵 속에서 자라난 소리의 폭발적 울림. 영화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 앞에서 소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소리 앞에서 침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항상 낯선 타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듣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폴라의 모습이 담긴 예고편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2. 음악은 주효할까?

 

어쨌든 <미라클 벨리에>는 음악영화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음악은 부차적인 요소다. 직접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지 않는 이상, 분위기를 돋우는 기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콩호텔>의 음악은 다르다. 이에 대해선 ‘<메콩호텔>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일 수 있는가?’)

 

물론 <미라클 벨리에>에서 음악은 주인공 폴라의 입을 통해 직접 전달된다. 말하자면 음악은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가 어떤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원스>(존 카니, 2006) 혹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빔 벤더스, 1999)이 그랬듯. 더구나 폴라 역의 루안 에메라는 가수 출신이기도 하다. 영화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by 벼

 

*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