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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

팽목항에서의 1시간

얼마 전 드라마 제작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면접 자리였다. 면접자들은 본인이 겪은 경험이 얼마나 갚진 것인지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잠자코 듣던 감독은 이내 한 가지를 물었다. “우리 사회 최대의 비극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면접자들은 모두 “세월호 참사”라며 답을 말했다. 이윽고 이어진 한 마디, “다들 훌륭한 인재들인데, 현장에는 다들 다녀오셨습니까?”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1년, 세월호는 내게 그저 풍경으로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팽목항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추모의 공간은 가까운 광화문이나 안산 단원고에도 마련되어 있지만 비극이 일어난 곳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팽목항 하면 떠오르는 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접한 이미지가 전부였다. 그걸 깨고 싶었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고,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여건이 맞았던 친구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2015/04/17 - [Issue/사회를 보다] - 세월호 1주년 팽목항에 다녀왔습니다

팽목항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5시간이 넘게 걸렸다. 당일 갔다 와야 하는 일정이었기에 팽목항에 머무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1시간 정도였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이 앞으로 내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도 터미널에서 팽목항을 향하던 중 서둘러 팽목항을 벗어나는 관용차량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 관용차량엔 환영받지 못한 정치인이 타고 있었다. 문득 검은 창문 뒤의 정치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그녀)는 슬퍼하고 있을까? 아니면 찡그리고 있을까?

 

마침내 팽목항에 도착했다.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뒷산과 대조적으로 바다는 고요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종교인들의 행렬이었다.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추모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의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보였다. 유족인지, 실종자 가족인지, 추모객인지 알 길이 없었다. 목탁 소리에 맞춰 절을 하는 사람도, 성가대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하염없이 바다를 보며 넋을 잃은 사람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만큼 하나 되어 슬픔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마주했다. 이제껏 나는 세월호 참사에 정면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유족들의 입장과 정부의 입장을 서로 비교해가며 어떤 쪽으로 합의를 해야 할지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데 그쳤다. 언론인을 꿈꾼다면서 정작 사람의 문제를 직면하지 못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단군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내가 아닌 그들의 문제로 치부했다. 그러면서 세월호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유족들의 뜻대로 해야 한다, 정부가 더 배려해야 한다는 둥 위선적인 도덕을 보였다. 그들의 슬픔과 문제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 떠들어댔다. 기껏해야 신문과 뉴스로 단편적인 소식을 접한 게 전부이면서 말이다.

 

봄 바다는 아름다웠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인과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들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잔한 물결은 고요하게 흐를 뿐이었다. 바다가 일렁일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커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느낀 것들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오늘 느낀 부끄러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까? 극복해낸다면 실천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답을 찾으러 팽목항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질문들에 떳떳하게 답하기 위해서 연민을 내려놓고 공감으로 가야만 한다. 연민은 자기합리화다. 자신과 다른 처지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며 위로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선 이 말은 위선과도 같다. 비탄에 빠진 이들을 치유하는 길은 연민이 아닌 공감이다. 자신을 비우고 상대방이 겪은 슬픔으로 채워야 비로소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100% 공감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반만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팽목항에서 얻은 교훈이다.

 

*사진 출처: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