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팽목항을 찾았다.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진도터미널 그리고 팽목항까지 5시간여를 달려 마침내 도착했다. 나에게는 첫 번째인 곳, 누군가에게는 사무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수십 차례 방문했을 이 곳에는 일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통과한 연후에도 무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팽목항의 시간은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을 가리켰다. 1년이 지난 4월 16일의 이곳을, 이 사건을 잊지 못한 사람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 단체들도 함께했다. 진상 규명과 진실을 인양해달라는 노란 리본들도 곳곳에 묶여 여전히 나부꼈다. 2014년 4월 16일부터 21015년 4월 16일까지 사계절을 돌아왔는데도 결코 봄은 자리할 수 없었다.
더없이 부끄럽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파제를 거닐면서 들었던 목탁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종소리는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304명의 희생자를 떠올리며 기억을 다짐하는 현수막들도 연이어 붙어 있었고, 유가족의 메시지도 벽 한 쪽을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떠올렸다. 한 발 한 발 천천히 발을 떼며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지난 1년의 시간 동안에 나를 말이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했던 날보다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산 날이 많았으며, 진심으로 공감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마음을 가열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나의 팽목항 방문은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반성문이었다.
불과 얼마 전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착잡한 심정이 담긴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작가들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읽으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소설가 김애란은 타인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 아래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진은영 시인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 연민이 아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팽목항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들으면서 그리고 만지면서 내가 다름 아닌 작가들이 경계했던 사람이었다. 고백하건대 여태까지 나는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 바깥에 머무는 사람이었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는 남의 일을 바라보듯 그저 연민하기 급급했던 사내였다.
나는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면서 누군가를 줄곧 나무라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 나무랄 대상을 찾았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찾던 와중에 레이더망에 걸린 사람들은 나보다 우매하다고 괄시했고, 비상식적이라고 여기며 그 누군가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무시는 이내 세월호 사고에 대한 무관심으로 번졌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 오후 1시에 도착한 팽목항에는 정오의 윤슬이 가득했는데, 평소 때와 달리 아름다운 윤슬이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 반짝이는 윤슬 아래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착잡함에 한 숨조차 나오지 못했다. 가타부타 누군가를 힐난하기만 했던 나의 몽매함에 혀를 거듭 찼고, 침이 바싹바싹 마르기 시작하며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오늘의 팽목항 방문을 기점으로 스스로에게 변화를 선포하겠다. 이 변화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타인을 논하기에, 정부를 논하기에, 국가를 논하기에 턱없이 모자란 나를 질책했던 순간이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러 갔던 나의 팽목항 방문은 부끄러운 자화상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