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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하다, 고로 존재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을 읽고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58쪽)

 

우리는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데 이 불안감의 원인은 일차원적이지 않다. 나만 해도 불안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선 나는 언론사 준비생 신분이다. 가고 싶은 언론사를 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데 있다. 날고 기는 경쟁자들을 제쳐 두고 원하는 곳을 가면 좋겠지만 그런 언시생(언론사 시험 준비생)들이 대다수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나 역시 가고 싶은 언론사가 (있지만 사실상) 없다.

얼마 전 학교 언론사 준비반을 나왔다. 1년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성의 소유자였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 잠재적인 경쟁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격의 없이 지내는 그 분위기가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언론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에 언론사 준비반 생활을 하며 타인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별다른 갈등이나 마찰 없이 지내던 내가 돌연 언론사 준비반을 나온 이유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었다. 내 마음 속 구석자리에 싹트고 있던 불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이 기자가 되는 걸 보며 축하해줬다. 물론 속으로는 부러움과 질투가 전혀 없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노력해서 얻은 결실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냉정히 말해 나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진 것이고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 사람이 기자가 된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기자가 된 분들이 좋은 기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고, 언젠가는 나도 저들의 동류집단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한편, 불안의 크기와 여파도 동시에 자라났다. 학기마다 새로운 사람들은 합류하고, 그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불안에 빠져 있을 내 미래가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지곤 했다. 나는 또 다시 그들에게 “혹시 필기 합격하셨어요?”라며 캐물을 것이며, 동일한 질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합격했다면 형식상 “축하드려요”라는 말을 하거나, 내가 합격했다면 역시 형식상 “운이 좋았죠 뭐”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나 혹은 상대방은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에 빠지는 무한반복 블랙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비교를 중단하자, 그러면 자연히 질투도 중단되고, 불안도 덜어지겠지.

 

그래서 이제 불안하지 않은가? 하고 자문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비교의 동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의 대상은 지천에 널려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잘 나가는 엄마 친구 아들 혹은 친척 한 명쯤은 곁에 두고 있다. 그들은 명절 때면 으레 가족 혹은 친척의 입을 통해 등장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가 꿈의 영역으로,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현실의 영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결론은 곁에 누가 있건 없건 불안한 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결정이 후회되진 않는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특정 시기에 (일상적인) 경쟁자로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좋아하는 이들은 평소처럼 만나면 된다.

 

자존심=이룬 것/내세운 것

 

단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사례에 불과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하는 일반적인 불안과 내가 종전에 느꼈던 불안은 일맥상통한다. 그는 이밖에도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데에는 기대와 그 충족의 여부에 달려있다고도 말했다. 내 경우에 적용해 설명하자면 서류합격을 기대하는 언론사가 10군데인데 1~2군데만 합격했을 때와, 기대하는 언론사가 5군데인데 1~2군데 합격했을 때 느끼는 불안과 자존감에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 같아도 당연히 후자보다 전자의 경우 불안을 더 느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초에 기대하는 바를 줄여나가면 불안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다. 다만 현실에 적용했을 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수히 많은 채용 기회 중에서 단 한번만 지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엄청난 용기의 소유자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이거나(어쩌면 둘 다인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간단히 말해 내세운 것을 줄이는 작업 자체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룬 것을 늘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 방법이 없다. 이럴 땐 저자의 해법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어차피 별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그가 해법으로 제안한 것들은 기실 우리 일상에서 쉬이 마주치는 것들이다. 철학, 예술, 정치, 종교(기독교), 보헤미아다. 내가 읽기에 그가 제시한 철학은 스스로 정립한 신념에 따른 고독의 길을 걷는 것이었고, 예술은 기존 가치에 대한 풍자로 인한 전복을 의미했다. 이는 기존 선험적 가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통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정치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었다. 종교의 경우 절대자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기존의 행해졌던 비교가치가 무의미해져버리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었고, 보헤미아는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완전자유의 상태를 의미했다(이는 앞서 언급한 철학의 고독한 면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가 제시한 해법이 우리의 불안을 없애줄 진정한 해법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람마다 느끼는 불안은 저마다 크기와 양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서구 사회 지식인이기에 그가 제시한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적용할 수 없는 개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세운 해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충분히 고민해보고 실천해볼 만한 해법들이라 할 수 있다. 해법을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개를 선택해 시험해볼 수 있고, 그 중 가장 잘 맞는 해법을 써보는 걸 추천한다(나의 경우, 예술과 종교는 성격상 맞지 않고, 보헤미아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어 실천하기 힘들고, 정치의 경우 워낙 어렸을 때부터 뉴스를 통해 접해온 이미지가 있어 마음이 동하지도 않기에, 결국 철학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다).

 

그가 제시한 해법이 불안의 소멸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불안은 상존하는 것이기에 그 극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불안이 없어지기보다는 없던 불안도 생겨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선한 불안도 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불안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가, 불안을 없애는 방향이 맞는가에 대한 자기반성 차원의 불안이었다. 이런 불안은 삶에 긍정적인 신호를 준다. 달리 말하면 활력을 일으켜준다. 이런 불안은 언제든 환영이다.

 

이 책은 불안감의 정의와 역사 그리고 해결책을 비교적 명확하게 짚어낸다. 불안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유사한 지점(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신이라는 절대자가 사라지면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더 불안해졌다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불안에 빠진 이보다는 불안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그 이유는 책을 다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