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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시선으로 본 삶의 흔적, 김훈 <개>

김훈의 <개>는 담담하다. 특별한 사건도 서사의 큰 줄기도 없다. 그저 개의 시선으로 사람의 삶을 보고, 듣고, 맡고, 핥고, 짖을 뿐이다. 개의 시선은 낯설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모두 이질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리고, 우리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러나 관습적으로 당연시했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령 새끼를 단순히 ‘먹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새끼의 고통을 몸속으로 ‘돌려보내는’ 행위로 승화하는 개의 시선은 미묘하게 대비된다. 이런 충돌은 죽음을 이해하는 서로의 방식에서 특히 극대화된다. 사람은 무덤을 두어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개는 죽음의 장소를 다시는 찾아가지 않음으로써 아픔을 견뎌낸다.

다른 한편 이 소설은 개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쉬이 관심 갖지 않을 개의 삶은 청춘, 사랑, 이별로 가득하고 따뜻함과 슬픔이 혼재한다. 개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사람은 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개의 삶은 외롭다. 그런데 이는 비단 개만의 문제는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도 마찬가지다. 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따듯한 정을 바라고,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신바람 나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며 배운다.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비단 사랑만 해도 그렇다. 보리가 맞이한 첫사랑의 비극만큼은 아니더라도 노상 사람들의 첫사랑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1부 시작에서 보리가 밝히듯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나보니 사람일 뿐인 것이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예측하고 알 수는 없다. 대부분의 개가 그렇듯, 사람들도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인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알 도리가 없다. 보리가 마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동네를 몸으로 익혔듯, 우리들도 오롯이 (직접 경험하든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든) 현실과 부딪쳐야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진리를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보리가 시골에서 어촌으로 떠나듯, 사람도 언제 어디로 떠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또 어떤가. 보리의 주인아저씨에게 찾아온 비극은 흰순이의 죽음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우선 두 죽음은 모두 불현 듯 찾아왔다는 점에서 자기결정권이 없으며, 남은 가족들(새끼들)에게 죽음을 대신할 어떠한 보상이나 대체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허망하다. 마지막으로 두 죽음은 그 자체로 고독하다. 죽음이 있기 전, 그러니까 삶에서의 추억은 연결된 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서서히 잊힌다. 살기 위해서 남은 이들은 잊어야만 한다. 주인아저씨의 1주기 때 영희네가 다른 마을로 떠나고, 흰순이네 집 갑수가 단상에서 글을 읽으며 울다가도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은 비난할 수 없는 행위다. 개와 마찬가지로 사람 역시 현재를 산다. 현재의 주인에 충실하듯, 사람도 현재의 삶을 살기 위해 버려야할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담담하다. 그렇다고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어디로 가든’ 세상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줄 것이고, 우리는 이제까지 경험으로 다져온 ‘굳은살’을 갖고 발을 내디디면 그만이다. ‘가난한 발바닥’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과 개다. 보리의 울부짖음을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발길 닿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