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그는 누구인가?

지난 3월 1일 방영된 SBS 스페셜을 보고 반가웠다. 김학철이었다. 지난해 과제를 이유로 마음에도 없던 두꺼운 책을 구입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당시 수업을 진행하던 강사 분은 “어쩌면 백범 김구보다도 더 여러분이 알아야 할 인물”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책이란 읽을수록 깊어지고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니까. 내게 <김학철 평전>은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기억해야만 하는 책이다.

“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중략)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김학철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채 책을 읽던 도중 이 부분을 읽으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 박헌영이라는 조선공산당 실세 앞에서, 그것도 ‘해방의 은인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고 외치는 이에 반발하여 저항한 절름발이. 이 장면에서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 등과 같은 이들을 향한 숱한 영웅담과 신격화에 대해 반발했던 김학철의 신념이 돋보인다. 사실 김학철이 활동했던 시기와 지역마다 그의 신념은 한결같이 일정하기에 어떤 배경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해방 공간의 김학철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후 되돌아온 해방의 공간이 갖는 특수성에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좌우 이념대립 논란 속에 있었는데 공산주의를 신봉했음에도 좌익 인사의 발언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찬동하지 않고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점에서 김학철이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의 좌우 대립은 좌와 우의 이분법적 대립이겠거니 싶었는데 숨겨진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는 이 시기에 초창기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작품들에서 다루는 주제는 주로 조선의용군의 낙천성과 생활성이다. 책에 언급되듯 전쟁을 겪고 형무소에서 신체의 일부를 절단했음에도 작품 속에서 그가 그렸던 모습은 우리 민족의 낙천성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전후 작가들은 전쟁의 비극을 그리거나 개인적인 아픔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그는 삶의 긍정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사실 나가사키 형무소에서도, 북으로 건너가서도, 중국에서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18살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소년, 29살에 다리를 잃다

 

 김학철이 가출을 감행하고 저 멀리 황포군관학교에 가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연도와 나이이다. 그는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민중의 적>에서 주인공 슈토크맨의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혼자 따로 서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감복하여 결연히 떠날 결심을 했다. 가족이 눈에 밟혀 돈을 다 가져가지 못했지만 그가 18살의 나이에 이 같은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 결국 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어린 나이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은 김학철이 부러웠다.

 

 이후 그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상해임시정부를 찾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의열단에 가입한다. 이후 그는 군인의 삶을 살아간다. 중국 호북 강릉에서 중앙육군군관핚에 입학하고 22세의 나이에 조선의용대 창립대원이 된다. 1941년 그는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다. 그는 이듬해 1월부터 4월까지 일본군의 심문을 받았는데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아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한다. 결국 그는 일본 본토로 건너가 수감생활을 했고, 1945년 29세의 나이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비극적이게도 그때가 바로 광복 직전이었다.

 

 시대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제대로 된 실천을 한 적 없는 나로서는 그의 청춘 시절이 마냥 대단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무력감과 한심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김학철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자신이 가진 신념이 올곧게 형성되어 있다면 그것에 맞춰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 하지만 아직도 용기가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어렴풋이 알 뿐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세월호 사고 관련 촛불추모제에 참석했다가 온 거리에 깔린 경찰들을 보고 한 편으론 겁이 났다. 집에 오는 길, 나는 그저 또래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길, 공부에 매진하고 취업이나 얼른 하라는 계율에 따라야 하는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획된 대로 사는 것이 정말로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런 구차한 질문에 대해 김학철은 그의 삶을 통해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1940년 8월29일 공산당 입당, 공산주의와의 조우
 
 김학철이 일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 이야기>를 읽고 계급사회에 대해 깨우침을 얻고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학철이 모든 일본인을 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들을 열린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김학철은 후에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일본인 친구들을 꽤 사귀었는데 이는 그가 조선-일본의 이분법적 대립에 빠지지 않고 개방적인 자세로 일본인들을 대했기에 가능했다. 독립운동가는 모든 일본인과 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편견을 깼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공산주의자가 된 후 그는 여러 나라를 방황했지만 초기의 공산주의 그 자체에 대한 신념은 꺾지 않았다. 다만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모택동과 같이 신격화된 공산주의, 그릇된 공산주의에 비판할 뿐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일당 독재 체제에 일침을 가했다가 북한에서 쫓겨났고, 연변에서는 1961년 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0년 징역형에 처해진다. 김학철은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에서 그는 당을 1인 독재의 도구로 전락시킨 데에서 공산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가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베토벤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 연주단이 문제이지 베토벤의 위대함마저 깎아내려서 되겠느냐는 그의 비유는 그럴듯하다.

 

 오늘날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박하다. 90년대 무렵까지 공산주의 관련 책들은 죄다 불온서적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는 분위기이다. ‘종북’의 옛말은 ‘빨갱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념의 토론에 있어서 자유가 없다. 부끄럽게도 나는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나의 게으름 탓도 있지만 내가 받은 교육과정 내에서 관련 개념을 공부해야 할 어떠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성의 적극적인 회복을 추구한다는 어렴풋한 내용만을 알 뿐이다. 그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선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구소련의 붕괴를 예로 들며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다.

 

 그런데 김학철에 의하면 소련이 붕괴한 것은 공산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 했기 때문 아니었나.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공산주의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소련이 붕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또 그것을 공부할 기회 역시 주어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김학철 평전을 통해 내가 접한 공산주의는 악마의 이념만은 아니었다. 오늘날 고도 자본주의에 대한 걱정과 우려는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좌절은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 역시 본래의 이념에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과연 누가 지휘하고 연주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또 다른 김학철을 찾아서

 

 사실 책을 구입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집 근처 서점에서는 이 책의 재고가 없었기 때문에 광화문까지 직접 가서 책을 구해야만 했다. 김학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제껏 한 번도 들은 이야기가 없었기에 책이 주는 내용은 새로움 그 자체였다. 김학철이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분대장이었음에도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주목 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가진 정직함 탓이라 생각한다. 옳지 못한 것에 대해 강단 있게 말했던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의 말년은 애통함의 극치다. 원산에 돌아가고자 했으나 끝끝내 죽어서야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조국. 그에게 분단된 조국은 절단된 다리보다도 더 아픈 상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어째서 20대 중반의 나이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내가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이 책을 접하지 않은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학철이라는 인물이 교과서에 실릴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항상 일본에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숨겨진 역사, 가려진 역사에 대해선 알면서도 침묵한다. 단지 그가 우리가 추구하는 이념과 다른 이념을 따랐다는 이유로, 또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식의 접근 방식으로는 결코 ‘통일은 대박’일 수 없다.

 

 한반도는 지난 60년 간 이념의 문제로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 북한이든 연변이든 그것은 우리의 역사이다. 헌법에서는 우리나라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명예직인 이북 5도 도지사까지 있는 마당에 어째서 문학, 역사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김학철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인문학을 하는 이들의 하나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끝으로 김학철이 남긴 말 중 가장 가슴에 울림을 준 말을 적으며 의지를 다잡아본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사진 출처: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