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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꿈보다 해몽> 텅 빈 기호들만의 모호한 향연

아무래도 꿈을 직접 다룬 영화 중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수면의 과학>(미셸 공드리, 2006)이 아닐까.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꿈속 세계를 영상으로 만든 시도 자체가 독특하고 발랄했던 영화. 하지만 원래 꿈이라는 것이 그렇듯,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던 영화. <꿈보다 해몽>을 보기 전에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뿐만 아니라, <수면의 과학>(수면)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꿈)은 홍상수와도 달랐고, <수면>과도 달랐다.

 

1. 반복의 미학

 

이광국 감독은 홍상수의 조감독 출신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광국과 홍상수의 유사점 혹은 변별점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둘의 유사점은 별로 많지 않았다. 쇼트가 길긴 했지만, 왠지 카메라는 다급하고 성급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쟝셴은 홍상수보다는 오히려 박찬욱과 닮았다. 대사나 영화의 전개는 허황했다. 하지만 나는 <꿈>에서 집요하게 등장하는 ‘반복’ 코드에서 홍상수를 떠올렸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여러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반복과 차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배경, 인물, 사건, 대사 등이 몇 번이고 반복된다. 하지만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 선희>에서 “끝까지 파”라는 말은 몇 번이고 반복되지만, 매번 그 발화자 혹은 의미는 다르다. 이를테면 홍상수는 같은 것을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다른 의미를 창출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의 영화 속에는 이런 장치가 종종 숨겨져 있다.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극장전> 등 수많은 영화에서 한 요소는 여러 번 반복되지만, 매번 다른 의미를 띤다.

 

<꿈>도 마찬가지였다. 하얀색 고물차, 소주, 번개탄, 연극티켓, 새우과자, 풍선이라는 소재들, 세 인물들의 엇갈리면서 만남, 그리고 자살이라는 사건은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홍상수와는 달랐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반복되는 요소들이 결국은 하나의 텅 빈 기호로 전락하고, 그에 따라 영화 말미에 그런 요소는(“끝까지 파”) 지워진다. 결국, 반복되는 ‘형식’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놓인 맥락, 거기서의 새로운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는 반대로 반복되는 요소들만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은 말 그대로 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요소가 반복되는 지점은 꿈과 현실 사이다. 얼핏 이어진 듯 보이지만, 절대 같지 않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반복되는 요소란 그 자체로 물질성을 가진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제요소들이 반복될수록, 홍상수와는 정반대로 기호들은 뚜렷해지고 강렬해진다. 기호들만이 뚜렷해지고 강렬해진다.

 

2. 기호들의 향연, 그뿐

 

내가 <꿈>을 ‘기호들의 향연’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꿈이란 게 그렇다. 프로이트는 꿈의 두 가지 특성을 압축과 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예로 드는 것들이 스핑크스 같은 이미지다. 꿈의 핵심은 이미지다. 압축되거나 전이된 이미지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해낸 것이 <수면>이었다.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기묘한 이미지와 혼합된 이미지. 꿈에서 문맥이란 없다. 있어도 중요치 않다. 다만 이미지들의 향연뿐.

 

<꿈>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홍상수와는 다르게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기호들‘만’이 뚜렷해진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는 오로지 텅 빈 껍데기로만 구성되어있다. 꿈이란 것이 원래 그렇듯. 하지만 왠지 <꿈>은 <수면>만큼 꿈에 충실하지 않는다. 애초에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꿈을 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는 이전 씬에서 꿈에 관해 얘기하겠다는 인물의 메시지뿐이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아무런 의미 없는 텅 빈 기호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 도대체 뭐가 꿈인지 뭐가 현실인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꿈 자체를 담은 씬도 그다지 꿈에 충실하지 않았다. <꿈>에서 꿈속 세계는 굉장히 명확했다. 이는 <수면>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서사가 개연성이 없다든지, 혹은 풍경이 낯설다든지 하는 것 말고는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사실상 <꿈>의 꿈에서는 압축되거나 전이된 이미지가 등장하지 않았다. 꿈속 요소들은 현실의 요소들과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 이미지, 기호들은 <수면>보다 훨씬 더 전면화되었다. 모호하지 않고 뚜렷한 기호들이 세계를 넘나들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영화의 전개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명징한 기호들뿐이었다. 

 

3. 모호함

 

하지만 이 영화는 역시 모호하다. 뚜렷한 것은 위에서 말했듯 기호들뿐이다. 나머지는 어느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나는 영화 초반에 맥락을 좇으려고 애를 쓰다가, 후반부에서는 아예 포기했다. 모호해진 꿈과 현실의 경계를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꿈이야 원래 모호하니까 상관없었다. 오히려 꿈에 대해서라면 <수면>의 꿈이 훨씬 더 모호했다. 하지만 거기서 꿈은 분명히 꿈이었으니까. 꿈은 분명히 영화 속 인물만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그저 꿈의 모호한 이미지들에 대해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그만이었다. 저럴 수도 있구나. 난해하구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뭔가 지나갔다, 정도로 꿈 씬은 넘어가면 됐다. 이후 현실에 몰입하면 됐다.

 

<꿈>을 보는 나의 자세는 달랐다. 꿈과 현실의 구분이 흐트러진 영화에서 나는 도무지 편안할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꿈들이야 분명 영화 속 인물들의 꿈이었지만, 애초에 꿈과 현실은 같았다. 결국, 나는 영화 자체가 나의 꿈이 아닌가,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나는 영화 전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든지(<꿈>의 영어판 제목은 <a matter of interpretation>즉 <해석의 문제>다.) 영화 전체를 멀찌감치 떨어져 보든지 해야 했다. 처음에는 몸을 스크린 쪽으로 쑤구려 적극적으로 영화라는 꿈을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역시 꿈에 대한 해석은 내 역량을 벗어났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고 있었다.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