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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삐딱하게 영화보기

<메콩호텔>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일 수 있는가?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인가? 음악은 영화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건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요새 개봉한 한국영화들을 줄지어 본 관객이라면 다소 낯선 이 두 질문에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서사면 서사고, 배우면 배우지 뜬금없이 음악이라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올 1월 들어 본 <국제시장>(‘<국제시장>,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다섯 가지 팁’)과 <허삼관>(‘<허삼관>, '감독' 하정우에 대한 첫 번째 기대와 실망’)에서 음악이란 영화의 편리한 소재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서 음악은 적재적소를 가리키는 지시 도구이자 텅 빈 기호였다. 울어야 할 때, 혹은 웃어야 할 때를 은연중에 ‘강제’하고, 감정적 효과를 증폭시키는 복병이었다. BGM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듯, 음악은 시종일관 영화의 뒤에 숨어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 관객을 저격했다. 관객은 음악이라는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음악의 효과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두 영화를 본 이후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없‘는가?’라는 물음은 자연스러웠으리라.

 

하지만 첫 문장이 그러했듯, 나는 지금 ‘영화에서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렇게 질문이 180도 바뀌게 된 것은 물론 또 다른 영화를 본 덕분이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입에 찰싹 달라붙지만 좀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 아름다운 이름. 이 정도만 안다면 영화 매니아의 반열에 올라도 손색없겠지. 이런 치기 어린 환상을 심는 (이름을 가진) 감독의 영화. <메콩호텔>(2012)에서 음악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쇼트=씬=개별자

 

음악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웬 쇼트, 씬 얘기냐고? 일단 나를 믿고 따라와 주시길. <메콩호텔>의 대부분 쇼트는 롱테이크다. 거기다 사실상 모든 쇼트는 곧 씬에 대응한다. 여기까지 봤을 땐 홍상수가 떠오르는 게 자연스럽다. 내게 홍상수라는 이름은 롱테이크와 ‘쇼트=씬’라는 의미를 지닌 ‘일반명사’이니까.

 

하지만 이제부터 얘기할 것들은 홍상수와의 변별점들이다. 우선 <메콩호텔>에서 쇼트는 ‘쇼트=씬’이라는 공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쇼트는 곧 씬으로서 위치하는데, 더 나아가 각 쇼트=씬(아래 ‘쇼트’는 모두 ‘쇼트=씬’의 줄인말이다.)은 개별자다. 여기서 개별자라는 것은 하나의 쇼트가 다른 쇼트로부터 자립해있다는 의미다. 하나의 쇼트는 하나의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다. 라이프니츠 식으로 표현해서 ‘모나드’랄까. 다른 말로 하면, 영화는 도대체 일관된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파편적 사건의 나열(<국제시장>)이나 옴니버스의 형식(<옥희의 영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메콩호텔>은 비유컨대 정신분열자의 말하기 방식을 취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는 쇼트. 거기서 둘은 서로 안면을 튼다. 이름까지 주고받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여자와 남자가 다시 만나는 다음 쇼트. 둘은 다정해 보인다. 마치 연인처럼. 난간에 걸터앉은 남자가 여자의 셔츠를 보곤 말한다. “셔츠 예쁘네요.” 여자가 답한다. “당신이 사줬잖아요.” 이 두 쇼트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자의 셔츠는 앞의 쇼트에서 입고 있던 셔츠와 같다. 그러니까 두 번째 쇼트에서 남자가 사줬다는 셔츠는, 첫 번째 쇼트에서 둘이 안면을 트기 이전부터 여자가 입고 있던 셔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쇼트는 또 어떠한가. ‘폽’이라는 귀신이 처음 등장하는 쇼트. 호텔의 복도로 보이는 곳에 쭈그려 앉은 여자는 (개의) 창자를 게걸스럽게 씹어 먹는다. 그리고 다음 쇼트. 여자는 태연히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카메라를 응시한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리고 여자와 그녀의 엄마의 투샷을 담은 다음 쇼트. 엄마의 독백 이후 여자는 말한다. 엄마가 귀신인 줄은 몰랐어. 그리고 바로 다음 쇼트. 귀신임을 밝힌 엄마는 배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여자의 창자를 게걸스레 먹는다. 다음 쇼트. 남자는 화장실에 숨어 그 장면을 보고 있다. 다음 쇼트. 침대에서 자는 남자는 웬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다음 쇼트. 여자와 여자 엄마가 석양을 배경으로 얘기를 나눈다.

 

영화에서 모든 쇼트들은 서로 어긋나는 방식으로 접한다. 이는 입체파(큐비즘)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파의 회화 형식은 누군가 그랬듯, ‘몽타쥬들의 꼴라쥬’다. 피카소의 그림만 봐도 그렇다. 한 인물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하여 각 부분을 다른 시점을 통해 그려내기. 거기서 부분은 전체를 전제로 하고, 전체는 개별적인 부분을 전제로 한다. 영화로 따지면 각기 다른 시점을 통해 그려낸 부분이 바로 쇼트다. 여기서 바로 홍상수와 <메콩호텔>의 두 번째 변별점은 회화적(관조적) 아름다움이다. 영화에선 간헐적으로 어떤 인물, 사건, 대사도 없이 그저 풍경을 한동안 비추는 쇼트가 삽입된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그런 쇼트가 없진 않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물, 사건, 혹은 배경을 에둘러 지시하는 수단에 그친다. 예컨대 가게 이름을 사진처럼 비추는 쇼트가 그렇다. 하지만 <메콩호텔>의 쇼트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어떠한 함의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영화 전체에서 그러한 쇼트는 그리 유별나지 않다. 애초에 모든 쇼트들 사이로 강렬한 경계가 그어져 있기 때문이다.

 

회화의 비유를 좀 더 더 밀고 나가보자. 결국, 나는 홍상수와는 다른 <메콩호텔>만의 두 가지 특이점을 회화로써 설명한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회화와 <메콩호텔>의 차이를 말해야겠다. 그래야만 음악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입체파) 회화에서 파편적인 부분들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는 달리 말하면 응축된 시간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기서 다양한 시점(視點)들은 하나의 시점(時點)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영화에서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 전체를 이루는 파편적 쇼트, 풍경, 이미지는 어딘가의 앞에 존재하거나 어딘가의 뒤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고는 사실상 파편적 부분, 개별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파편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인가. <포레스트 검프>같은 경우야 강렬한 서사를 통해 나열된 파편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 계기가 존재했다고 하지만, <메콩호텔>은 위에서 말한 것들이 전부다. 그럴듯한 서사도 없다. 그렇다면 <메콩호텔>를 하나의 ‘꼴라쥬’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인가? 

 

  

- 그러니까, 음악

 

결국 음악으로 돌아왔다. 앞의 꼭지는 사실상 이 이야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음악이라고 해봤자 서정적인 기타선율이 반복되는 게 전부다. 하지만 나는 이 반복되는 음악에 반했다.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마저 포근하게 감싸는 기타 소리에 넋이 나가, 영화를 반복해서 재생시켜 놨었다. (물론 mp3 파일을 찾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음악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음악은 위에서 말했듯 영화(영상)가 감당하지 못하는 시간을 담당한다. 음악 자체가 시간이다. 음악은 시간 위에서 나른하게 흐른다. 그러므로 음악이야말로 영화의 개별적인 쇼트를 아우르는 전체다. 입체파 회화에서 파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힘이 응축된 시간에 있었다면, <메콩호텔>에서 파편적 쇼트를 하나의 전체 속에 둘 수 있던 계기는 시간의 흐름을 도맡았던 음악의 끈질김이었다. 또한, <포레스트 검프>에서 서사가 맡았던 역할을 <메콩호텔>에서는 음악이 맡는다. 이는 영화에서 음악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하지만 감독은 쇼트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음악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음악의 시간은 영화의 시간을 대리하지만, 결코 음악의 시간이 영화의 시간 자체가 되는 것을 감독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건 분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만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음악이 끊겼다 다시 시작되는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음악이 멈춘 쇼트에선 음악이 대신했던 (영화의) 시간이 풀려난다. 두 인물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눈다. 음악의 시간이 정지한 곳에서 영화의 시간은 그네들의 대화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음악. 음악의 시간은 영화의 시간을 대신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쉽게 음악에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자, 등을 보이며 얘기하던 두 인물의 시선은 동시에 카메라를 향한다. 영화의 꿈틀거림. 이는 자기 존재를 어필하려는 영화의 몸부림이 아닐까. 또한, 다른 쇼트에서 음악이 멈췄다 다시 시작되기 직전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기타 리허설 둘째날/라오 호텔’. 음악의 몸부림. 위에서 영화가 음악의 존재에 앞서 꿈틀거렸듯이, 음악도 영화와 마주하여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음악(의 시간)은 영화의 시간을 대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음악의 시간도 그 자체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이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