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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주말이다 영화야

<허삼관>, '감독' 하정우에 대한 첫 번째 기대와 실망

*보기에 따라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1월의 기대작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지극히 주관적인 1월의 기대작 세 편’) 하정우가 메가폰을 잡은 <허삼관>도 그 중 하나였다. 글에 적어놨듯, <허삼관>은 <롤러코스터> 이후 내가 접한 ‘감독’ 하정우의 두 번째 영화였다. 하지만 <허삼관>은 내가 ‘감독’ 하정우에 대해 처음으로 기대한 영화였다.

‘역시 하정우는 연기자야.’ 영화관을 나오면서 강렬히 떠오른 생각이었다. 적잖은 실망과 함께.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정우에 대한 애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감독’ 하정우에 대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것 맞지만, 결코 하정우의 새로운 영화를 외면할 순 없을 것만 같다. 다르게 말하면, <허삼관>에서 나는 ‘감독’ 하정우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가능성을 보았던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네 항목으로 나눠서 <허삼관>에 대한 소견을 적어보았다.

 

1. 헤테로토피아


‘가능성’ 운운했지만, 공교롭게도 네 항목 중에 이에 해당하는 건 단 하나에 그친다. 회초리질을 한 뒤에 약을 발라주는 것이 도리이겠으나, 왠지 하정우에게라면 약부터 발라주고 싶다. 내게 하정우란 그런 사람이니까. 매를 맞을수록 더 힘이 나고, 발전하는 그런 사람. 입바른 칭찬 앞에서 결코 오래 머물지 않을 사람.

<말과 사물>에서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a)’를 기존 토대와 질서를 전복하고 무효화시키고, 해체하는 개념으로서 제시한 적이 있다. ‘헤테로토피아’란 ‘다른(이질) 공간’이다. 이는 잘 알려진 ‘없는 공간’, ‘유토피아(utopia)’와는 다르다. 쉽게 말해, ‘유토피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토대와 질서 위에 자리하는 공간이라면, ‘헤테로토피아’는 토대 자체가 불가능하며(불가능한 토대 위에서), 질서를 거부하고(무질서를 앞세우고) 흔들리고 해체되는 공간이다. ‘헤테로토피아’에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고 인식하고 있던 이해의 모든 질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헤테로토피아’를 설명하기 위해선 유니콘, 용, 켄타로우스 등의 신화적 상상력 속에나 존재하는 ‘없는’ 존재들을 상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건 ‘유토피아’에나 존재한다. 반대로 ‘헤테로토피아’에서는 현실 세계에 천착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을 전복하는 방식으로서 존재한다. 현실의 전복과 동시에 현실을 설명하는 것.

 

짧은 설명으로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건 오산이겠지만, <허삼관>의 세계는 ‘헤테로토피아’다. 알려졌다시피 <허삼관>은 중국 소설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한다. 당연히 원작의 배경은 중국이다. 하지만 하정우는 <허삼관>의 배경을 중국으로 하지 않았다. <허삼관>의 배경은 한국이다. 공주, 청주, 서울 동대문 등. 구체적인 지명들을 넘나든다. 인물들은 중국어를 쓰지 않고 한국말을 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언어나 지명 말고는 <허삼관>의 배경을 한국으로 인식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다. 예컨대 인물들의 이름부터 그렇다. 허삼관(하정우 분), 허옥란(하지원 분)과 둘의 세 아들(일락, 이락, 삼락), 근룡(김성균 분) 등. 또한, 인물들의 옷차림에서도 중국이면 중국이지 한국을 연상시키기가 좀처럼 어렵다. 마을의 전반적인 풍경도 유사한 시대를 다루고 있는 <국제시장>과 비교했을 때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확실히 중국풍이다.

내가 <허삼관>의 세계를 ‘헤테로토피아’로 인식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이 어긋나고, 그로 인해 관객의 인식이 흔들리는 지점. 최소한 <허삼관>의 배경이 되는 나라에 대해서 우리는 판단을 중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판단의 중지는 정적인 멎음이 아니라 끊임없이 동요하는 동적인 흔들림이다. 이를테면 나는 쉽사리 <허삼관>의 배경이 중국 혹은 한국이라는 식으로, 즉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쉽사리 규정지을 수 없다. 관객은 <허삼관>의 뒤섞이고 혼란한 세계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가 싶으면 끊임없이 중국적인 제요소들이 눈에 밟히고, 중국인가 싶으면 한국어와 익숙한 지명들이 거슬린다. 그러니까 관객은 <허삼관>을 보는 내내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나는 ‘감독’ 하정우의 가능성을 얼핏 보았다.

 

‘헤테로토피아’로서 <허삼관>의 배경자체가 유발하는 효과 때문이 아니다. ‘헤테로토피아’는 <허삼관>의 배경에 그친다. 이를 통해 ‘감독’ 하정우의 앞날에 대해 기대를 걸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나는 차라리 ‘헤테로토피아’라는 세계를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감독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더 이상 ‘헤테로토피아’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이 어려운 단어는 그만 잊어도 좋다. 다만 그러한 실험적인 장치를 도입한 감독 하정우의 심리를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어떤 용기가, 혹은 포부가 있지 않았을까. 새로운 것, 낯설고 불편한 것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비록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플롯도 거의 유사하지만, 영화의 감독으로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포부. 혹은 ‘소설’이라는 장르와 구별되는 ‘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영화인’으로서의 고민과 신념. 그런 것들 말이다. 그것만으로 ‘감독’ 하정우의 앞날에 기대를 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2. 앞서가는 사건과 허겁지겁 뒤쫓는 개인

 

이제부턴 <허삼관>에 대한 비판이다. 비록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플롯도 많이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비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영화에서 감독의 선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니까. 굳이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그대로 따르는 것조차 감독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허삼관>은 크게 세 개의 시퀀스로 나뉜다. 허삼관과 옥란이 결혼하기까지의 시퀀스, 아들 일락을 둘러싼 갈등을 다룬 시퀀스, 그리고 일락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허삼관의 고군분투를 담은 마지막 시퀀스. 또한 각 시퀀스 내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제시된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매번 인물들이 사건을 뒤쫓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사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인물들은 그 사건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고나 할까. 인물들은 수없이 많은 사건들 사이에서 휩쓸릴 뿐이었다. 거기서 내가 어떤 감정적 동요를 느꼈다면, 그건 인물들의 내적 고민, 갈등, 감정선의 흐름에 대한 동조 혹은 반감이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사건들에 휩쓸리는 인물들에 대한 안쓰러움일 따름이었다.

 

당연히 인물들의 내적 고민을 다른 부분에 대한 할당량은 적었다. 나는 어떻게 허삼관이 일락을 자기의 아들로 인정했는지, 그 심리를 아직도 짐작조차 못 하겠다. 또한 일락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허삼관이 옥란에게 느끼는 (오락가락하는) 감정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일락이 허삼관과 하소용 사이에서 방황하는 씬도 좀처럼 납득이 안 된다. 물론 개인적인 고뇌의 비중을 줄이고 속도감 있게 영화를 전개해나가려 했던 하정우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사건이 끊임없이 범람하는 와중에 굳이 개인의 심리를 드러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발생한 갈등은 또 다른 사건의 등장으로 해결되곤 했다. 거기서 개인의 심리가 들어갈 여지가 있기는 할까. 사건들의 연쇄를 통해 영화가 속도감을 얻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딱 들어맞는 서사의 진행 때문에 개인들은 사라졌다, 관객이 영화에서 느끼는 감정이 한 개인(혹은 가족)에게 들이닥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치는 한, 거기에 정서적 공감(반감)과 그로 인한 인식적 충만함(혹은 카타르시스)의 여지는 없다. 

3. 우연들의 향연

 

근래 들어 이렇게 많은 우연적 요소가 개입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싶다. 굳이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들 보면 알 테니까. 특히 두 번째 시퀀스 후반부부터, 그러니까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우연적 요소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나는 거기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열심히 작업을 이어나가다가 에라 모르겠다, 남은 것들을 다 싸질러버린 느낌이랄까. 포기라기보다는 자기도 주체 못 하는 짜증남으로 인한 난리 통? 이건 이 정도로 끝내겠다. 

4. 노심초사?

 

맨 처음 항목에서 <허삼관>에서 하정우의 포부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에서 반대로, 하정우의 부족한 자신감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보이기도 했다.

 

우선 음악이 뻔하다. 음악이 뻔하다는 건 관객들에게 음악의 흐름으로 울거나 웃어야 하는 순간들을 콕콕 집어준다는 의미이다. 일전에 <국제시장>에 대한 글에서 나는 이것을 윤제균 감독의 전략적인 장치로 설명한 바 있다.(‘[주말이다, 영화야] <국제시장>, 비판적으로 보기 위한 다섯 가지 팁’) 하지만 하정우는 윤제균만큼 영화감독으로서 잔뼈가 굵지 않고, 또한 위에서 짚었듯이 나는 하정우를 도전적이고 영화인으로서의 신념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실이야 어떻든) 나는 하정우가 이러한 장치를 쓴 것이 단지 대중성을 건드려서 관객 수를 늘리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지 않는다. 차라리 하정우는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관객이 따라오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던 게 아닐까. 정말 순수하게. 혼자 예상했던 관객의 반응을 그대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정말 ‘감독’으로서 관객에게 온전히 자신의 영화를 즐기게 하려고. 나도 왜 내가 이렇게까지 (윤제균과는 달리) 하정우에게 방어막을 쳐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한테 하정우는 분명히 그런 사람이다.

 

또한, 몇 개의 쇼트에서 한두 사람이 소리를 지르거나 싸우거나 할 때면 꼭 대중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그리고 카메라는 대중에 둘러싸인 인물을 잡지 않고 대중의 표정을 하나하나 잡았다. 갈수록 이런 방식이 반복되자 나는 불편해졌다. 그건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을 강요, 혹은 제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식의 전략은 최근에 <제보자>(임순례, 2014)에서 적나라하게 쓰이기도 했다. 이것도 하정우의 노심초사 때문이 아닐까. 그는 아마 예상된 관객의 표정을 아예 스크린 속에 담아냄으로써 일종의 위안을 느꼈을 수도 있다. 또한, 관객이 스크린 속에서 반응하는 인물들의 표정에 동화되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제보자>에서 이러한 전략에 대한 불쾌함을 충분히 느껴버렸던 터라, 하정우가 예상한 표정을 짓거나 감정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사진출처: 다음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