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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푸디세이아

[푸디세이아] 15. 시장이야기 1

기억은 공간과 감각과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시간 감각이 휘발되는 그 세계 속에서 기억은 하나의 지표에 잇대 복원된다. 먼지에 묵힌 채 잊혀진 기억은 사소한 음식의 맛 하나로, 혹은 작은 기시감 하나로, 또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오래된 과거는 미래가 되고, 현재는 수많은 조각들 가운데서 숨 쉰다. 망각의 동물은 수많은 죽음들 가운데서 헤엄치다 불현듯 눈을 뜬다.

 

기억하는 걸 포기했던 남자는 그렇게 모든 걸 심연 속에 넣고 살아간다. 계기만 있다면 모든 건 다시 떠오를 것을 알기에. 열쇠는 언제나 주머니 속에 들어있다.

 

1. 인생의 맥주는 저 멀리 광주 송정역의 168월에 있었다. - 광주 송정역시장

 

 

시장이라는 오래된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지표면에 살아 숨 쉬는 기억들을 마치 내 것인 냥 간직해도 좋을 만큼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여름, 광주. 목포까지 내려갔던 나는 길을 거슬러 광주로 향했다. 제대로 된 목적이나 계획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사람의 발걸음은 역으로 가벼웠다. 늦은 밤,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떠나야 할 길. 거리를 이곳저곳 헤매다가 뜬금없어 보이는 시장을 봤다. 1913 광주 송정역 시장.

 

아마도 도시계획처럼 계획이 도입된 듯한 시장은 말하자면 리모델링된 시장. 조명을 달고 중앙부엔 와이파이 중계기를 설치했다. 예전부터 장사해오시던 분들의 가게들은 간판 정비를 통해 전체적인 시장 분위기와 어울리게 맞췄다. 거기에 술집과 디저트 가게 등을 운영하는 젊은 상인들이 더해지니 시장의 분위기는 젊어진 듯한 느낌. 도착한 시간이 밤이었으므로, 아마도 낮의 시장의 모습은 이와는 또 달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게들이 끝나는 곳엔, 오래된 건물을 재단장해 만든 술집이 있었다. 무려 서울의 크래프트비어집 같은 느낌이 나는 맥주 양조장. 조용히 가게에서 맥주 한 잔을 주문해 기다리며, 주변 풍경을 눈으로 훔쳤다. 서울이었다면, 단골이 되지 않았을까. 플라스틱 잔에 맥주를 받아들고 거리로 나선다.

 

한 모금.

 

무더운 여름날, 무언가에 홀린 듯 기차를 타고 미친 듯 걸었던 하루.
모든 진과 기운이 다 빠진 대파마냥 시들시들했던 밤.
그 날의 쌉싸래했던 그것은, 인생의 맥주였다.

 

아마도 영영, 그 어떤 순간에도 다신 그 맛이 나지 않을.

 

(계속)

 

 

 

By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