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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너머 리스본에는

[서평] 리스본행 야간열차

 

 

빼어난 기억력과 그리스와 라틴, 헤브라이어에 대한 지식으로 문두스(Mundus, 세계)란 애칭으로 불리는 고전학자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일평생을 큰 일탈 없이 살아온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포르투갈 여인을 만나게 된 이후 마법에 홀린 듯 리스본으로 떠난다. 말 그대로 불현듯 그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세계를 무너뜨리듯 떠난 그의 여정은 이후 거짓말과도 같은 마법처럼 펼쳐진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레고리우스의 시선에서 그가 고서점에서 얻게 된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이자 포르투갈인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여정 두 가지의 큰 흐름으로 진행된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의 삶을 찾아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 리스본. 언어조차 잘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각자의 시선과 기억을 통해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마데우의 삶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와도 같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그레고리우스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레고리우스를 통해 책이 그려내는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삶과 그의 글은, 소설인 동시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독재자이자 교수였던 살라자르의 긴 통치기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아마데우란 개인의 삶과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삶이 마치 촘촘하게 기록된 연대기와 같이 펼쳐진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정과 함께 하는 아마데우의 글들은, 마치 잠언과도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사랑, 정치, 투쟁, 우정, 가족과도 같은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그 모든 조각들이 합쳐질수록, 단선적으로 제시됐던 다소 평면적인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더 풍부해지고, 인간으로서의 그의 면모 역시 부각되기 시작한다. 현대적 인간의 고뇌와 번민은, 아마데우가 살아온 삶이 “불경한 신부(神父)”, 혹은 ‘대성당’ 그 자체와도 같은 모습이었기에 더욱 부각된다. 스스로 너무 완벽하였기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마저 황홀한 삶이란, 마치 불꽃놀이와 같다.

 

모든 것을 한순간에 버리듯 떠난 그레고리우스의 삶 역시 만만치 않다. 그 스스로 하나의 세계인 그는, 때때로 찾아오는 일탈의 기회들을 스스로 접다 말년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을 집어던진다. 오래된 언어들을 담은 살아있는 도서관과도 같던 불변의 ‘문두스’는, 스스로 그 모든 언어들이 쓰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 자신만의 ‘오디세이’를 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여전히 ‘오디세이’ 중 단 한 번 쓰인 단어 리스트론을 떠올리지 못해 현기증을 느끼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도서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하는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여정이다.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했던 아마데우의 삶이 그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랑’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을 모든 조각들을 맞춰오던 그레고리우스가 알게 된 곳이 세계의 끝, 카보 피네스테레라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완성’시킨다. 각각의 ‘세계’들이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세계의 끝에서, 그렇게 여행은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제목과 간단한 설명만 보고 단순히 노 교수의 일탈 정도로 받아들이기엔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다루는 내용과 의미들은 너무 무겁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세계와도 같다면, 그런 의미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그려내는 아마데우와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들은 ‘우주’와도 같은 무게를 갖는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엄격하기에 읽는 사람마저 짓누르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는 삶의 두 단면은 ‘세계의 끝’에서 조우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가 된 이야기는 다시, 오래됐지만 동시에 다시 새롭게 쓰인 또 하나의 ‘오디세이’인 동시에 새로운 ‘고전’이 된다.    

 

By 9.

 

 

* 사진 출처 : 들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