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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세상은 소설보다도 못하여

[서평] 왕과 서커스

 

<고전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베루프 시리즈’ 중 하나인 <왕과 서커스>. 전작 <안녕 요정>에 등장한, 작중 시점에선 갓 프리랜서 행보를 시작하려는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추리소설이다. 작중 배경은 황태자에 의해 당시 국왕이었던 비넨드라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가 일가족 8명이 사망한 2001년의 네팔.


크게 강렬하지 않은 반전, 전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평면적인 캐릭터들, 약간 미완성 된 듯한 감정선과 플롯 등 그의 전작들보다 크게 좋다고 할 수 없는 다소 평범한 추리소설이지만, 책은 오히려 조금은 낯선 포인트에서 다른 의미를 통해 의의를 갖는다. 이는,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프리랜서 ‘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다치아라이 마치는 작중 내내 기자로서 홀로서기 위한 고민을 이어간다. 졸업할 무렵 시험을 봐서 우연히 기자가 됐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명하는 그는, 동료의 죽음이란 극단적 상황을 마주한 후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어디에 소속됐다는 이름표를 떼는 순간에, 그는 방향을 상실한다. 취재를 위해 접촉한 라제스와르 준위의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다치아라이 마치는 자신이 어떤 기자가 되려 하는지, 왜 이런 기사를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변변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마치 서커스처럼, 자신들의 비극을 결국엔 ‘희화화’하게 될 뿐이라는 준위의 말에 그는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사건이 격해지고 혼란해질수록 다치아라이 마치의 고민도 깊어진다. 열악한 환경 아래서도 취재를 계속하고, 정보들을 파헤치고, 다조 밋밋할 수 있는 자신의 기사를 “특종”으로 만들 수 있을 ‘사건’도 접하지만, 그럴수록 생각은 많아진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모든 판단과 답을 자신이 내려야만 하는 상황들이 반복된다. 그 힘든 고민들 끝에, 그는 자신의 길을 찾고, 특종을 포기하고 다소 밋밋하지만 사실만을 담은 기사를 써서 보내고, 얽힌 사건들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 결말이 다소 허망할지라도 말이다.

 

다치아라이 마치는 말한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밝혀내고 싶어”라고. “BBC가 전하고, CNN이 전하고, NHK가 이미 전했더라도 내가 글을 쓰는 의미는 거기에 있다.”고. “몇 명, 몇백 명이 제각각의 시점으로 전하는 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간다. 완성에 다가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은, 작중의 처절한 고민과 아픔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소설이라서 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낼 필요도 없고, 현실적인 어려움의 무게를 가지고 있지도 못하니까. 무엇보다도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언론사와 기자들을 가진 이 나라의 현실이, 각오가 가끔은 소설 속 고민보다도 약해보인다고 느껴지는 건 처절한 일이다. 어려운 환경과 아픔 속에서 싸워가는 이들을 알지만, 이들의 입지가 소설 속 주인공이 얻은 작은 인정과 성취보다도 못하게 느껴지는 건 서글픈 일이다.

 

가끔, 세상은 소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게 되길 바라는 마음마저도 소설 같은 것처럼 여겨지기만 한다면,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by 9.

 

* 사진 출처 :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