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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비평은 무엇입니까? - 영화 <동주>에 부쳐

category 영화 2016. 2. 27. 13:49

“선생님, 비평가란 무엇입니까?”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당돌한 질문에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답했다. “쓰레기죠. 비평가는 쓰레기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쓰레기들이죠. 이들은 역사가 지나간 다음에 남아 있는 걸 뜯어먹고 사는 쓰레기들이죠.” 이 말을 비평이 사후적(事後的)이라는 의미라고 해석해도 괜찮다면, 나는 바르트의 저 대답에 반만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비평이란 무엇인가?    

 

나쁘게 말하면, 비평이란 자기놀음이다. 문화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발판삼아 휘도는 원운동이랄까. 절대로 비평은 원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지독하게 말해, 비평은 비유컨대 문화라는 숙주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문학 비평에 한정 지어 보자면, 비평이 아무리 문학이라는 범주 속에서 다른 갈래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독립적인 비평이란 불가능하다. 언제나 비평은 문학, 문화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은 사후적이고, 권혁웅의 말처럼 비평은 늘 ‘늦되다’.

 

여기까지 얘기한 비평가의 위치는 바르트가 ‘쓰레기’로 의미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역설적으로 비평의 위치는 문화의 모든 것을 앞질러 있기도 하다. 비평은 언제나 사전적(이데올로기적)이다. 문화를 문화로서 호명하는 것이 바로 비평의 책무다. 다르게 말하면, 문화는 비평을 ‘표절’한다. 피에르 바야르에 따르면 볼테르는 셜록 홈스를, 모파상은 프루스트를 ‘예상(이미) 표절’했다. 시간상 불가능한 이 말은, 직설적으로 말해서 창작이란 과거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미래의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창작을 하는데, 그것이 현실성과 시의성을 갖게 되는 것은 언제나 후대의 유사한 창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자는 전대의 작가가 아니라, 현실성까지 두루 갖춘 후대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유사하게, 문화가 나름의 의미체계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비평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문화는 사후적이며, 언제나 비평보다 늦된 것이다.

 

종합해보면, 비평이란 바르트가 말했듯이 사후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전적이다. 이렇게 문화라는 것과 비평이라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문화로 말미암아 비평은 가능하고 비평으로 말미암아 문화는 가능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순환논증의 오류. 농담이라고 치부하기에 비평은 쓸데없이 진지하다. 결국, 비평가란 농담 따먹기 같은 소리를 꽤 진지하게 하는 사람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비평가들은 농담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르트는 얼핏 자학적인 답변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이 쓰레기들이 위험한 까닭은 전염병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비평의 역할입니다. 전염병을 퍼트리는 것, 그래서 사회에 말하자면 이 전염병을 퍼트려서 이 생각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는 쓰레기가 될 때, 이 쓰레기는 창조적인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비평가의 역할은 전염병을 돌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무섭고도 조심해야 하며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이 말을 내 식대로 좀 바꿔도 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다. 비평이 자기놀음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비평이 농담 따먹기 같은 소리를 좀 진지하게 하면 어떠냐. 중요한 건 비평이 대중들을 움직이는 힘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많은 사람을 전염시키며 온 세상을 배회하고 다니는 비평의 그 파급력이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한 고위험군 병자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어떤 불온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구심력이다. 그것은 규칙적이지 않은 운동들을 끊임없이 창출해낼 것이다. 변화에 둔감한 사회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을 옥죄어 오는 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정지를 모르고 떠돌아다니는 전염병이 감염시킨 대중들의 창조적 움직임은 끝을 모를 것이다. 비평가의 역할은, 비평의 위치는 이러하다. 다만,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건 바르트가 그렇게 말했던 시대에서의 비평,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비평의 위치는 저러‘했었’다. 이제부턴 지금까지 말했던 것과 아마도 전혀 다른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 읽지를 않으니 전염력은 말할 것도 없이 미미한 시대. 각자 소수의 독자를 거느린 다수 작가들이 만연한 시대에 대하여. 아마 가까이는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좀 더 멀게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그러니까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몰락) 전후. 범위를 넓혀보면 소위 포스트 모던한 시대 즉 슬라보예 지젝이 그랬듯, ‘지배 이데올로기를 믿는 정직한 ‘멍청이’ 혹은 ‘그걸 믿는 척하는 똑똑하지만 타락한 ‘냉소주의자’’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하는 시대에 대하여. 가라타니는 시대의 흐름을 태연한 척 응시한 뒤 자의적인 경계를 그으며 ‘문학’의 종언을 선언했지만, 엄밀히 말해, 끝맺음 된 것은 ‘근대’의 문학이었다. 어쨌든 지금도 문학은 보란 듯이 살아 있으니까. 다만, 근대의 문학이 맡았던 역할은 분명히 문학의 영역을 벗어난 지 오래 되었다. 그 역할이란 학생들에게, 시민에게, 민중에게 즉 사회로 옮겨졌다. 말하자면, 가라타니가 사망선고를 내린 건 문학의 ‘정치성’, 풀어서 말하면 문학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능성이었다. 문학이 갖고 있던 전염성이자 파급력이고 구심력이었다. (비평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은 다수의 소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향유하는 자기 놀음이 되어버렸다. 그가 직접 언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에서부터 현재의 라이트 노벨들과 그 적극적인 향유층 까지.

 

현재 비평이라는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볼 순 없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에 대해 ‘냉소주의(Cynicism)’라는 항체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듯하다.  냉소주의는 풀어 말해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정의? 진리? 진실? 그런 거 다 좋은 말들이야. 그리고 사회는 그것들에서 멀어지고만 있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우리가 뭘 어쩔 수 있는데?” 아무것도 결국 해낼 수 없다는 생각. 모든 것들이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리고 말 거라는 회의. 강력한 항체 앞에서 전염병은 죽을 못 쓰고 쉽사리 잠잠해지고 말 것이다. 그 파급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비평에 대해 열광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라면, 레비가 바르트에게 한 질문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어야 한다.

 

“‘지금’ 비평가는 무엇입니까? (비평을) 읽지 않는 시대에 비평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전염력마저 상실한 자기놀음으로서의 비평은 정말로 무엇일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깜냥이 내게는 없다. 나는 비평가도 아니고(비평가 지망생쯤으로 해두자) 습득한 지식도 굉장히 얕다. 내가 지금 비평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혹은 이러이러하다고 무모하게 선언할지라도 그건 무시해도 좋을 만한 가벼운 허언 혹은 개인적인 다짐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질문을 멈출 수 없다.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더라도, 저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질문들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으니까. 온몸이 부서질 듯 아프고 발열에 잠 못 이루던 사람이 증상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다 끝내 신 내림을 받듯, 나는 어떻게 해서든 병적으로 되풀이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한다. 그것이 답을 알 길 없는 질문에 대한 회피라고 해도, 엉뚱한 방법에서 찾는 것이라 해도.

 

비평에 대한 질문에 맞서서 여러모로 부족한 나는 앞으로 비평을 더 많이 해볼 수밖에 없다. 영화 <경주>(장률, 2014)의 최현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을 ‘똥’이라고 말하지만 (추측건대) 다시 강단에 올라서게 되듯이. 나도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회의감에 휩싸인 채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딜 참이다. 어쨌든 사사키 아타루가 ‘세계(=문화)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비평은 자기들의 죽음 이후에 멀쩡히 돌아갈 세계가 두려운 종말론자들에 의해 섣불리 죽음‘들’을 선언 당한 이후에도 지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을 테니까. 이제 시작이다. 그 어느 즈음에, 아니 지금부터 그때까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지금의, 비평은 무엇입니까?” “읽지 않는 시대의 비평이란,”이라며 운을 뗄 수 있는 날까지.   

 

by 벼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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